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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 오직 은혜로 가는 길 / 사순절 셋째주일 장 본 목사 202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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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 오직 은혜로 가는 길

 

사순절 셋째주일

20250323

 

전도서 9:11-18

11 나는 세상에서 또 다른 것을 보았다. 빠르다고 해서 달리기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며, 용사라고 해서 전쟁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더라. 지혜가 있다고 해서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총명하다고 해서 재물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배웠다고 해서 늘 잘되는 것도 아니더라.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12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 물고기가 잔인한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는 것처럼, 사람들도 갑자기 덮치는 악한 때를 피하지 못한다.

13 나는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겪는 일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14 주민이 많지 아니한 작은 성읍이 있었는데, 한 번은 힘센 왕이 그 성읍을 공격하였다. 그는 성읍을 에워싸고, 성벽을 무너뜨릴 준비를 하였다.

15 그 때에 그 성 안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므로, 그의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16 나는 늘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 어리석은 통치자의 고함치는 명령보다는, 차라리 지혜로운 사람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

18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19-30

19 여러분은 어지간히도 슬기로운 사람들이라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잘도 참아 줍니다.

20 누가 여러분을 종으로 부려도, 누가 여러분을 잡아먹어도, 누가 여러분을 골려도, 누가 여러분을 얕보아도, 누가 여러분의 뺨을 때려도, 여러분은 가만히 있습니다.

21 부끄럽지만 터놓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너무나 약해서, 그렇게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자랑을 하려고 하면, 나도 감히 자랑해 보겠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말을 해 보겠다는 말입니다.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25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26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27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28 그 밖의 것은 제쳐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29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

30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들을 자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3:1-12

1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4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에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문 곽을 크게 만들어서 차고 다니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린다.

6 그리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7 장터에서 인사 받기와,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선생은 한 분뿐이요, 너희는 모두 형제자매들이다.

9 또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 분뿐이시다.

10 또 너희는 지도자라는 호칭을 듣지 말아라. 너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2주 전에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사자성어 하나를 알려드렸지요? 바로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사자성어였지요. 음흉한 마음으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에게 사자성어 하나를 알려드립니다.

 

오늘의 사자성어는 언행일치(言行一致)’입니다. 말씀 언(), 행할 행(), 한 일(), 이를 치() 자를 씁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이 먼저입니다. 내가 한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거죠.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는,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만 합니다. 언행일치가 아니라, 언행불일치입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 사랑하는 행동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럼 신앙인의 모습에서 언행일치란 무엇일까요? 이왕 사랑이야기 나왔으니, 사랑이라는 단어로 풀어보죠.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해요. 그런데 친구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해요. 울먹울먹하면서 힘들다고 말하죠.

 

사랑하는 친구니까 뭔가를 해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친구 대신 학교생활을 해줄 수는 없잖아요. 힘내라고 말해 줄 수 있지요.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죠. 그런데 내가 신앙인이라면, 하나를 더 할 수 있어요. 바로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거죠. ‘하나님, 친구가 학교생활 잘하도록 힘을 주세요. 지켜 주세요.’라며 기도하는 거죠.

 

신앙인은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보다 한 가지 일을 더 해야 해요. 그건 내가 한 말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행동도 해야 한다는 거랍니다. 말과 행동이 같이 가야 비로소 신앙인으로 완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할 일이 많을 수 있어요. 그런데요, 그렇게 신앙인으로 살면 좋은 일도 있답니다.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존재로 설 수 있게 돼요. 하나님을 향한 존재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절대로 그릇된 길을 가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은진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은 신앙인으로 살아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현재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하나님을 향한 존재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세 본문 순서를 바꿔서 복음서-서신서-구약의 말씀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먼저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았던 분입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사신 분이죠. 얼마나 같았냐면, 너무 한결같아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한 번만 부인했으면 살았는데, 그걸 못해서 죽으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라고 한 번만 말했어도 살았는데, 그걸 못해서 죽으셨습니다.

 

요즘 세상 말로 해 볼까요? 세상살이, ‘융통성이 없어 죽으셨습니다. 융통성이라고 했습니다.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 일을 이리저리 막힘없이 잘 처리하는 재주나 능력을 뜻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필요한 능력 중 하나라고 평가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 시대에서 이런 융통성을 기가 막히게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절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자신들의 조상,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칭송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대놓고 비판하십니다. 정말 대놓고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말은 다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씀하시네요. 그들의 말은 율법, 즉 하나님의 계명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은 지키는 것이 맞지요.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말과 행동을 다르게 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질책과 비판은 계속 이어집니다. 눈으로 따라오세요.

 

4,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남의 어깨에 지우는 사람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 사람들.

5,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

6, 윗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7, 인사 받기와 선생님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이것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이들은 당시 회당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대놓고 그들을 언행불일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정말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네요.

 

역으로 갑니다.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면 됩니다. 무엇이든지 같이하면 됩니다. 보이려고 일하지 않으면 되지요. 윗자리, 높은 자리 앉아 봐야 여러분이 앉은 교회 의자보다 불편합니다. 그렇게 살면 사람들이 저절로 와서 인사합니다.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럼,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분, 예수님 같은 수준이 되면 됩니다. 불가능하다고요?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같은 종교적 수준, 도덕적 수준을 갖추면 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면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렇게 살면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9절과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신앙인의 선생님은 하나님뿐이라고요. 신앙인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라는 선생님께 배우고, 우리의 지도자인 그리스도에게 배운 것을 이 세상에 적용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삶인 거죠.

 

우리나라 사회의 어지러움이 계속되면서, 또 교회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도 그랬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한 듯합니다. 요즘 교회가 왜 비판을 받는지 아십니까? 선생님의 자리에, 지도자에 자리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상한 것들을 올려놓고 마치 우상숭배하듯 하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이 세상에 적용할 수 있음은 지금도 언행일치의 삶을 이루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의미합니다. 4절에서 7절까지 예수님의 질책을 받을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달라야만 합니다. 1112절입니다.

 

11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높아지면 그가 낮추시리, 우리가 낮아지면 그가 높이시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나 자신을 드리는 섬김의 모습이 되기를

 

우리가 사순절 기간, 하나님께 불러드리는 찬양, <섬김>의 가사입니다. 이 길 말고는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괜찮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융통성 없는 신앙인으로 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편지가 신약성경에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아요. 그런 바울에게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참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에 능했거든요.

 

오늘 융통성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과연 바울은 정말 융통성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바울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교회라기보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고 생긴 공동체의 지도자였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겠네요. 유대교 종교지도자, 그리스 철학자와 토론해도 밀리지 않는 그였습니다.

 

그러니 바울도 세상 힘 가진 자들의 미움을 사게 되지요.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들과 토론하여 이길지 몰라도 그의 복음 전파로 생긴 공동체에는 시련이 닥쳐 왔거든요. 몸은 떨어져 있고, 공동체에 위기는 커가고,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은 편지로 그들을 격려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자랑을 시작합니다. 자랑은 율법학자들, 바리새파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던가요? 바울의 자랑을 확인합니다. 22절과 23절 상반절입니다.

 

22,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23a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까지요) 22절에 나오는 그들은 공동체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지요. 좀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요. 그들 앞에 바울은 나도 히브리 사람이고, 나도 아브라함 후손이고, 나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자랑하는데 좀 이상합니다. 23절 하반절부터 눈으로 따라오세요.

 

23절 하반절,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24, 유대 사람들에게서 서른아홉 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입니다.

25, 채찍으로는 세 번 맞았고, 돌로도 한 번 맞았어요. 배가 난파를 당한 것이 세 번이나 됩니다.

26, 강물에 빠질 뻔도 했고, 강도에게 당할 뻔도 했어요.

27, 굶어 죽을 뻔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게 자랑이라고 합니다. 얻어맞고, 옥살이하고 등등요. 이게 자랑은 아니잖아요? 30절에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꼭 자랑을 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약점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요.

 

바울이 자랑거리도 되지 않는 이런 약함을 자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무력함 가운데 경험한 은혜를 전하고 싶었던 거죠.

 

인간적으로 할 자랑이 아님에도 그것을 자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내가 간 그 길보다 더한 길을 예수가 걸었고, 그분으로 인해 내가 삶의 방향전환을 했고, 그것이 오늘의 바울과 여러분의 공동체를 만들었노라고... 그러니 힘내시라고... 잘 가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 받는 고난이라면, 그것마저 은혜가 된다는 사도 바울의 오직 은혜만으로라는 유명한 그의 신학이 완성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그저 융통성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방향전환 하도록 이끄신 예수님 앞에, 진정한 언행일치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지요.

 

오직 은혜로만 / Sola Gratia’ 많이 들어 보셨지요? 사도 바울의 오직 은혜는 골방에 앉아 기도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말과 그에 따른 행동으로 하나님 주시는 오직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구약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중요한 두 가지 말씀을 복음서와 서신서를 통해 받았습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그러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김으로 살아가고, 그것이 시련을 가져올지라도, 그 시련 마저 은혜의 삶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도서의 말씀에서는 그런 신앙인의 삶 가운데 우리가 간과할 수 있는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삶의 어려움은 언제, 어디에서 닥칠지 모릅니다. 피할 수도 없어요.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충격적인 사건과 사고, 끊이지를 않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염세주의적으로 변하기도 하죠. 종말론을 신봉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도자가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지혜로 어떤 성읍을 구한 예를 들면서, 때론 작은 한 사람의 지혜가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편히 살기 위해서는 힘 있는 자 편에 서는 것이 좋을지 모릅니다. 세상살이 그래서 힘 있는 사람들 곁에는 늘 사람이 북적북적 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힘 없는 사람들, 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가 크니까, 우리가 다수니까, 우리가 주류니까 당신들 소수는 우리를 따라와 잔말 말고... 이런 세상이 되는 거죠.

 

누가 떠오르시나요? 언행불일치라며 호통치시는 오늘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생각나지 않으시는지요? 힘 좀 가지고 있다고 당시 세상을 호령하던, 율법주의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나요? 오늘 구약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받는 이유입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 세 절입니다.

 

16 나는 늘 지혜가 무기보다 낫다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사람의 지혜가 멸시받는 것을 보았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 어리석은 통치자의 고함치는 명령보다는, 차라리 지혜로운 사람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

18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

 

 

4. 사순절 셋째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언행일치를 강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길, ‘낮아짐섬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낮아짐과 섬김의 길에서 자신이 받았던 고난조차도 오직 은혜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세상 융통성 없는 지도자 예수와 그를 따르는 바울을 우리는 만납니다.

 

우리는 융통성 없는 지도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어떤 길일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나 더 기억하십시다. 한 사람의 목소리, 한 사람의 몸짓, 한 사람의 억울함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신앙의 민감성을 더 갖추십시다. 사순절이니까요.

 

이런 언행일치의 삶을 위해, 우리는 지난 제직회에서 억압받는 필리핀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평택 새벽의 집분들을 초대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를위해 다음 주일 전교인집담회에서 함께 고민하고 준비할 것입니다. 언행일치의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을 만나고, 전도자를 만납니다. 그 만남 가운데 우리는 2025년 새롭게 신앙인으로 태어납니다. 말과 그에 따른 행동이 같아지는 삶, 오직 은혜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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