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 / 창조절 둘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09-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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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 창조절 둘째주일 교회연합주일 20250914 창세기 10:32, 11:1-9 32 이들이 각 종족의 족보를 따라 갈라져 나간 노아의 자손 종족이다. 홍수가 난 뒤에, 이 사람들에게서 여러 민족이 나와서,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님께서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고린도후서 4:1-6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3 우리의 복음이 가려 있다면,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입니다. 4 그들의 경우를 두고 말하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5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여러분의 종으로 내세웁니다.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3:14-23 14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물건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사람은 깨달아라) 그 때에는 유대에 있는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하여라. 15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도 말고, 제 집 안에서 무엇을 꺼내려고 들어가지도 말아라. 16 들에 있는 사람은 제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 말아라.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19 그 날에 환난이 닥칠 것인데, 그런 환난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20 주님께서 그 날들을 줄여 주지 않으셨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이 뽑으신 선택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줄여 주셨다. 21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23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목사님이 중학생 때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게요. 제가 중학생 때 도덕이라는 과목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이름인지 모르겠네요. 도덕 시간에는 과거의 철학자, 종교 분야에서 나온 사상과 윤리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상과 윤리를 통해 현재를 비추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윤리적인가를 공부하는 시간이었죠. 참 재미없는 시간이기도 했답니다. 도덕 선생님이 계셨어요. 성함은 이*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실명을 밝히면 좀 그러니까 가명으로 이수교 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참 멋있는 선생님이었어요. 외모가요. 요즘은 비주얼이라고 하죠? 큰 키에 모델같은 몸, 늘 양복을 입으셨는데 참 멋졌습니다. 양복도 매번 바뀌었어요. 어느 날 수업 때 여러 종교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불교도 배우고, 유교도 배웠어요. 기독교도까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종교가 없어. 하지만 내가 믿는 종교가 있지. 그건 바로 이수교야.’ 선생님 이름이 교로 끝나니까 불교, 유교, 기독교의 마지막 교 자와 라임이 맞잖아요. 그러면서 당신은 다른 종교 대신 이수교, 자신의 이름을 믿는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책에 없는 이야기들을 시작하셨습니다. 각 종교의 부정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였어요. 그런데 기독교를 말씀하실 때, ‘교회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 이러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들었죠. 제 주위에 친구들이 말합니다. ‘본이는 목사님 아들이에요.’ 제가 생각했습니다. ‘에이 그 말은 하지 말지.’ 어렸을 적 목사 아들이라는 소리가 참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런데 그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수교 선생님은 그 말씀을 하시는 동안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씀하셨어요. 제 얼굴은 어느덧 붉어졌습니다. 마치 제 잘못인 듯 느끼게 되었거든요. 그 뒤로 도덕 수업시간은 정말 싫었습니다. 멋진 슈트발도, 잘생긴 얼굴도 필요 없었어요. 그런데요. 그 선생님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최연소 교감으로 승진하셨는데 얼마되지 않아 뇌물 혐의로 교단을 떠났습니다. 전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자기 이름 믿고 살다가 저리 되었다고요. 솔직하게 ‘쌤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3 정도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이제 그 중3 학생은 어른이 되어 목사로서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사건을 목사로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름 있지요? 장린, 박시온. 제가 예전에 이름대로 살아가라고 했었지요? 그래요. 이름처럼 사는 것 중요합니다. 열심히 살게 하거든요. 그런데요. 이름만 믿고 살잖아요? 그럼 자기가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를 수 있어요. 그래서 나의 이름을 하나님께 비춰보아야 한답니다. 그러면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가 보여요. 열심히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은 다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기에, 우리 옆에 계시기에 내 이름을 비춰 볼 수 있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랍니다.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우리 은진의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하나님께 여러분의 이름을, 여러분의 삶을 비추어 보며 자라는 기독교인으로 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께 비추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 비춰보며 살아가고 계시냐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께 비추며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을 비추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고, 세상을 쓸어 버리셨습니다. 너무 악했거든요. 그리고는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문을 통한 시작이었습니다. 노아의 자손은 오늘 창세기 10장 32절처럼 여러 민족, 여러 세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석으로 건물을 짓다가, 벽돌 굽는 방법을 알아냅니다. 벽돌로 집을 지으면 자연석으로 짓는 건물보다 훨씬 튼튼합니다. 지금은 벽돌에 시멘트를 발라 올리지요.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 역청이었습니다. 이것도 건물을 훨씬 튼튼하게 하는 발견이었습니다. 참 똑똑한 존재,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의 자신감이 충만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11장 4절입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도시를 세우자. 탑도 쌓고,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 그렇게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의 이름을 날리게 하자.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이름을 날리게 하잡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중3 시절 이수교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항상 결론은 같습니다. 이름을 날리려는 자는 무너지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제 경험치에서 나오는 것이니 설교에서 전할 내용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좀 더 신학적인 맥락이 필요해요. 여러분 비행기 타 보셨지요? 이륙할 때, 착륙할 때 육지의 건물들이, 바다의 배들이 어느 정도 크기로 보이시나요? 약지 손톱보다도 작아 보이지 않던가요? 그것도 이착륙 때나 잠시 보이지 비행기가 높이 뜨면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 땅에서 벽돌로 역청을 사용해 탑을 쌓은들 보이기나 할까요? 하늘에 닿자고 했던 사람들의 마음, 과연 하늘 어디까지나 닿을 수 있었을까요? 이름을 드높인들, 하나님 앞에 그 이름이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높은 건물을 지어봐야 우리나라에서는 잠실에 있는 롯데월드타워입니다. 엄청 높죠. 123층에 555m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고작 555m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빌딩을 품고도 헤아릴 수 없는 이 하늘과, 땅에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거든요. 교우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세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한다는 말은 내 이름이 드러나더라도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고 내 삶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 규정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합니다. 감사하게 합니다. 창조절 둘째주일,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이름을 날리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비추어 그 이름을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말씀은 사도의 직분을 맡은 이들에게 주시는 바울의 당부입니다. ‘사도’라고 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사도라 함은 예수님이 뽑은 열두 제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 신자, 교우보다 훨씬 높은 위치라고 생각하게 되죠. 하지만 사도에는 이런 뜻도 있습니다.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 이렇게 봤을 때, 우리는 모두 사도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예수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그 옛날 사도가 아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그 마음 품고 함께 읽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서 이 직분을 맡고 있으니,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어집니다. 2절입니다. 2 우리는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환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우리 자신을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사도는 간교하게, 나쁜 꾀를 내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삶, 2절 마지막 우리 자신을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만사, 우리 뜻대로 가지 않습니다. 어쩔 땐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가려져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3절 마지막, “그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가려 있는 것” 뿐이니까요. 그래서 자꾸 빛이 가려지는 것 같아 보이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때마다 5절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모두 사도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으로 선포하는 우리는 사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5절 하반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때문에 우리 자신을 종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6절입니다. 6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시 오늘 설교 제목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십니다> 그리고 뒤에 <...>이 있습니다. 그 <...> 뭔가 생략한 제목이 더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시지만, 우리 옆에도 계시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입니다. ‘동행’ 하십니다. 5절 “빛이 있으라”고 창조하신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의 빛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지만, 우리 옆에도 계신 분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옆에서 주님이 지으신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여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함께 사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임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회당에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나가면서 웅장하고 멋진 회당을 바라보며 감탄하던 제자들에게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 일갈하시고, 이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종말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14절부터 19절까지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상이 서 있는 곳을 보거든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라. 높은 곳으로 가라.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우상이 있는 곳을 떠나라. 왜냐면 이런 환난과 재난은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그런 일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큰 재난의 징조는 이어집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좀 더 귀담아 보아야 합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21 그 때에 누가 너희에게 ‘보아라,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 보아라, 그리스도가 저기에 있다’ 하더라도, 믿지 말아라.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마치 이단이 판을 치는 현재 상황을 보는 듯하지요. 우리 이단 예방교육에서 배웠잖아요. 예수가 아닌 자신을 구원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이라고요. 그런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들을 홀린다고요. 모두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사람들입니다. 환난의 때, 재난의 때에는 그런 이름들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문선명이 그랬고, 정명석이 그랬고, 이만희가 그랬습니다. 그 이름이 예수의 이름을 덮습니다. 그런데 그래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셔서 우리가 빛과 어둠을 구분할 수 있도록 사도의 길을 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려는 사람들 앞에 27절처럼 조심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감사하며 겸손하되, 세상의 이름 앞에서는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단호하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그리스도를 예수로 고백하는 사도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4.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고백하는 믿음이며 신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신앙 앞에 사람은 겸손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만이 그 이름이 드높아져도 사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높지 않아도 사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 위에도 계시지만, 우리 곁에도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동행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창조절 둘째주일, 우리의 삶이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름 지어지고, 겸손과 동행이라는 사도의 길을 함께 걷는 여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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