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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단! 새로운 세계를 향해, 끊어내다. / 종려주일 / 제주4.3기념주일 | 장 본 목사 | 2026-03-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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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결단! 새로운 세계를 향해, 끊어내다. 종려주일 제주4·3기념주일 20260329 누가복음 9:28-36 28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29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30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34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36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청소년을 위한 말씀과 여러분을 위한 말씀을 합하여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성경말씀과 더불어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드릴 예정이니까, 청소년 여러분도 함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본래 종려주일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이지요.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은 이제 기득권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단의 표현이었습니다. 기득권. 당시 로마제국의 힘이기도 하고, 그 로마제국에 빌붙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유대교와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5주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겪으신 고난을 생생하게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왔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세워진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겪으신 지난 5주 동안의 고난은 모두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그러니 역사적 시간으로 볼 때, 오늘 본문은 시계를 조금 뒤로 돌려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말씀과 더불어 우리 교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님 한 분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려주일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목사님의 이름은 문익환입니다. 모두 들어본 이름이실 겁니다. 고인이 되신지 오래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지는 못하실 텐데 은진 평화의 날 강사로 우리 교회 강단에 서신 적도 있습니다. 그분의 흔적을 우리가 지금도 매주 확인하고 있으니, 여러분 보시는 새번역성경의 시편을 번역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고(故) 문익환 목사님은 신학교수이면서 성서학자셨습니다. 성품은 정말 온화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1989년 방북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을 때도 그분을 아는 많은 사람은 참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문 목사님의 절친 두 명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단짝 친구였지요. 시인 윤동주, 장준하 선생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분들이잖아요. 이 세 분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1940년대 초반 일본은 패망의 전주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 악독해진 걸까요? 망할 때 더욱 지독해져서일까요?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의 청년들에게 징집령을 내립니다. 일본 군대에 강제입대하게 만드는 것이죠. 징집령이 내렸을 때 문익환 목사님과 시인 윤동주, 장준하 선생은 모두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징집령에 대한 세 사람의 대응방식이 서로 달랐습니다. 여기서부터 파란만장한 이 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지요. 문익환 목사님은 일제의 징집령에 응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요. 하지만 시인 윤동주는 달랐습니다. 징집에는 응하되 일본의 국력이 약해졌을 때 군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습니다. 또 한 사람, 장준하 선생은 이미 일본에 찍힌 몸, 입대하고 탈영을 한 후에 광복군으로 합류하겠다고 했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예수님 양옆에 있던 두 범죄자 기억하시죠.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만났었잖아요. 우리는 살다보면 똑같은 상황에 다르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이 세 사람도 ‘징집령’이라는 똑같은 상황에 각각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처럼 말이죠. 2. 사자성어 하나 말씀드립니다. “우유부단” 우유부단(優柔不斷) 넉넉할 우, 부드러울 유, 아니 불, 끊을 단 자를 씁니다. 한자대로 풀면 넉넉하고 부드럽기만 해서 끊고 맺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사자성어입니다. 정확하게 풀면 ‘어물어물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이죠. 우유부단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답답합니다. 이럴 땐 이렇게 결정하면 참 좋겠는데, 주저주저하면 속이 뒤집히지요. 특히 앞에서 이끌어 주는 리더가 우유부단한 사람이면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우유부단함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다른 것 아닙니다.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결단력은 어떤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결단력은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분별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이것과 저것 중에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한가지 혹은 그 이상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선택에 따라 반드시 취하는 것이 있고, 버리는 것이 있습니다. 결단력을 가지고 판단했을 때, 내가 취해서 득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버려서 실이 되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모든 책임 또한 결단한 사람이 져야 합니다. 3. 오늘 말씀을 함께 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열두 제자 중 믿을만한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산에 오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에 오르시죠. 그런데 그곳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빛이 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시는데 그게 바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모세와 엘리야였던 것이죠. 베드로는 확신했습니다. 내가 따르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선지자 엘리야를 잇는, 아니 그들보다 더 뛰어난 예언자이자, 선지자일 것이라고 말이죠. 그런데 걱정도 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31절에 예루살렘에서 죽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죠. 베드로는 예수님을 절대 산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가면 그것은 곧 죽음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입니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떠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가 어부이긴 한데요. 어떻게든 집을 지어보겠습니다. 세 채를 만들겠습니다. 한 채는 모세를 위해, 한 채는 엘리야를 위해, 한 채는 선생님을 위해 지을 테니 제발 여기서 같이 사시죠.’ 수제자다운 말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수제자다운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35절에서 음성으로 이런 말씀을 주시지요. 확인합니다. 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어떻게 되었을까요? 37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산에서 내려오니...”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고맙긴 한데, 산 밑으로 내려가자꾸나.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산 밑이구나. 함께 내려가자꾸나.’ 예수님은 산과 산 밑을 두고 기도하시다가 결국 산 밑으로 내려가시는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산 밑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지요. 결단력을 가지고 선택하신 것이지요. 4. 제가 아까 결단한 뒤에는 득이 있고 실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다시 1940년대로 돌아가 문익환, 윤동주, 장준하 선생님의 삶을 돌아봅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징집을 거부하고 일본을 떠나 연변지역 용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이 바로 ‘명동촌’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목사가 되었고, 우리가 보고 있는 구약성경을 번역하기까지 이르렀지요. 시인 윤동주 선생은 입대 후 군내 반란을 일으키자는 것을 동료가 밀고하여 붙잡히게 됩니다. 그 이후 일본의 악독한 생체실험실습의 마루타가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지요. 우리에게 ‘서시’라는 그 유명한 시를 남기고 말입니다. 장준하 선생은 실제로 일본군 입대 후 탈영해서 광복군에 합류합니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님을 만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 1세대 정치인으로 활약합니다. 하지만 정의를 외치다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문익환 목사님은 절친한 친구 둘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이후 생을 살아갑니다. 빚은 갚아야 하기에 친구 동주와 준하가 못다했던 일들을 하면서 생애 마지막 17년 중 11년 6개월을 옥에 갇히면서도 그렇게 민중을 위해,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돌아가셨습니다. 5. 예수님은 산 밑으로 내려오신 후 어떻게 되셨을까요? 결국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최고로 잔인하게, 아프게, 힘들게...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공교롭게 소신을 가지고 결단력을 발휘한 모든 사람은 그렇게 처절하게 죽어갔습니다. 결단력을 발휘한다는 것, 어쩌면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엔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력은 꽤 중요합니다. 왜일까요? 윤동주 선생의 그 결단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살기를 새롭게 각오하면서 삽니다.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장준하 선생의 그 결단 때문에 절대권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이 생겨나게 되었지요. 그분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만큼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문익환 목사님의 그 결단 때문에 저 같은 인간도 목사로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살게 되었지요. 그분의 발자취를 조금이라도 따라가 보려고요. 예수님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산 밑으로 내려가자는 결단을 하셨기에 산 밑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이 복음이라고, 몸으로 보여주셨기에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여러분, 신앙은 ‘결단(決斷)’입니다. 신앙에서 결단이란 무엇일까요? ‘결(決)’은 올바른 길을 분별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기를 열어놓는 것’이고, ‘단(斷)’은 ‘끊고 잘라내는 것’이지요.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되, 그러기 위해 끊어야 할 것은 과감히 끊어내는 신앙의 결단!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베드로가 지은 집에서 편히 사셨다면, 아마 우리는 저 유대교의 권위적인 랍비들처럼, 남들을 정죄하면서 살게 되었겠지요. 잘되면 내 탓이요, 잘못되면 네 탓이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 그 산을 내려오는 결단을 하셨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곁으로 내려오는 결단을 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믿게 되었지요. 나의 결단으로 내 목숨은 끊어질 수 있습니다. 내 결단 때문에 나에게 손해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결단이 향하는 방향성이 나보다 남을 위한 것이라면, 내가 결단하는 그 이유가 내가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남이 잘되기 위한 것이라면, 내가 결단하는 것이 거짓과 위선보다 참되고 이 세상의 진실을 향하게 되는 것이라면, 내가 결단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 결단 때문에 나 자신이 설령 죽는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시대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살 수 있게 되고, 이 시대에 목사다운 목사가 되기 위해 죽으라고 살게 되고, 그리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름답게, 미친듯이 살아가게 되는 여러분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윤동주 선생님 덕분에, 장준하 선생님 덕분에, 문익환 목사님 덕분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게 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우리는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다 아시다시피 부활주일 전 40일 동안의 시기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기도하는 기간입니다. 그 옛날 신앙의 선조들은 이 사순절 동안 종려나무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고, 금식하며 어려운 이들에게 선행을 베풀며 이 절기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잊지 않으려고,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 신앙으로 이어가기 위해 경건하게 지내는 기간이지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이 사순절 기간에 그저 예수님을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인지,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만드는 것인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결단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결단할 때입니다. 그런데요. 결단하실 때 잊지 말아야 할 것 말씀드립니다. 35절부터 36절 상반절까지 함께 읽으며 마음에 받습니다. 35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36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우리가 결단할 때 어떤 것이 예수님의 뜻인지 잘 분별해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그 소리가 그치고 보인 것은 오직 예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을 향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들으셔서 예수님께서 가자 하시는 산 밑에서, 산 밑 사람들과 부대끼며 예수님처럼 결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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