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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의미, 용서(容恕) | 장 본 목사 | 2026-04-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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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의미, 용서(容恕) 부활주일 20260405 마태복음 28:1-15 1 안식일이 지나고, 이레의 첫 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2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주님의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그 돌 위에 앉았다. 3 그 천사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그의 옷은 눈과 같이 희었다. 4 지키던 사람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떨었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찾는 줄 안다. 6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그는 살아나셨다. 와서 그가 누워 계시던 곳을 보아라. 7 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 8 여자들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 엇갈려서, 급히 무덤을 떠나, 이 소식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고 달려갔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11 여자들이 가는데,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였다. 12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병사들에게 은돈을 많이 집어 주고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고 말하여라. 14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 15 그들은 돈을 받고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이렇게 한 번 더 인사합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부활주일 성찬식이 있는 관계로 청소년을 위한 말씀과 여러분을 위한 말씀을 합하여 전해드립니다. 부활주일, 부활절을 기념함에 있어서, 우리는 보통 부활 그 자체를 강조하고 부활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부활이 무엇일까요? 부활은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과 답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집니다.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의 사고 체계로는 부활은 쉽게 알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에 관해 설명하면 할수록, 이런 질문은 우리를 그저 지식의 차원에 머물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설명으로 풀어내고 과학으로 입증하는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성서에서도 우리는 그저 일방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통보만 받습니다. 성경은 부활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부활을 해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부활을 입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활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지, 성서는 그날 일어난 사건, 우리가 ‘부활’ 또는 ‘부활 사건’이라고 이름 붙인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만약 부활이 설명할 수 있는 것, 입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아마도 성경을 기록한 이도 나름대로 설명하고 입증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돌려야 합니다. ‘부활이 무엇인가?’라는 질문보다는 ‘그날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활 아침에 일어난 일을 제대로 상기해 보면, 어렴풋이 부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떠났습니다. 그분은 죽었습니다. 그분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죽음은 배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하튼 그분은 살아있는 자 가운데서 사라지셨습니다. 죽음. 그것은 그분이 모든 사람과 모든 것들과 접촉이 끊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연락도, 어떤 신호도 없게 되었다는 것, 그야말로 ‘무(無)’,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바로 그때,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를 ‘무존재’, ‘존재 없음’으로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분은 더는 세상에 없으니 그분이 없는 채로, 그분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에, 그분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확인합니다. 9절입니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분이 돌아오신 겁니다! 그분이 정말로 살아오신 겁니다! 알렐루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우리는 열과 성을 다해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은 큰 지진으로 시작합니다. 이어 천사가 나오고, 비어 있는 무덤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실에 가진 감정이 있습니다. 눈으로 성경을 따라오십니다. 4절,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 두려움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는지 죽은 사람처럼 되었답니다. 8절, 여자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느꼈던 감정. 역시 무서움이었습니다. 기쁨도 엇갈려 있다고 성서는 전하고 있네요. 12절, 두려워 죽은 사람처럼 된 경비병의 보고를 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옵니다. 13절과 14절에서 경비병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합니다. 허위 진술을 하게 한 이면에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의 공통된 감정을 느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거기엔 예수를 죽인 자들이 있었고, 예수를 때린 자들이 있었고, 예수의 죽음에 좌절하고 슬펐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기쁨조차 두려움과 교차하는 감정이었습니다. 빈 무덤 이야기를 듣고 기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다 두려워했고,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분이 분명히 무덤에서 없어졌는데, 어떻게 없어진 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비병들은 두려웠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민심이 흉흉해질까 봐 겁을 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돈을 집어 주면서, 그분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게 했습니다. 제자들조차 그들대로 몹시 겁에 질려 있던 터라 빈 무덤 이야기를 기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젠 시체를 훔쳐 갔다는 누명을 쓸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조차 ‘예수님의 부활이 두렵습니다, 지금.’ 3. 여기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그들 모두가 고약하게도 그분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예수라는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모질고 고약하게 대했던 그 예수가 무덤 속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불려간 엘리야에 관해, 하늘로 불려간 에녹에 관해, 무덤을 찾을 수 없는 모세에 관해 모두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비어 있는 무덤’이라는 것은 무덤 안의 사람이 불려갔다는 것, 즉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그렇게 못되게 배신한 베드로가 무덤을 확인하고서 집으로 가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모든 사람이 겁에 질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희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도록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죽었으니, 예수를 너무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과소평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제,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까요? 과연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까요? 그분이 설마 복수하실까요? 이제 그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9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10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자신이 당했던 그대로 되돌려 복수할 수 있는 그분이 나타났고, 이제 막 행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활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부활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믿음.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은 그 당시 유대교에서는 흔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정작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폭풍이 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현장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겁이 났던 겁니다. 그들이 행했던 그대로 되돌려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자신들이 죽인 분이 살아오시니 이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단지 평강을 빌어주시고, 그저 전해달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전에 있었던 일들을 완전히 잊으신 것 같았습니다. 그 비열한 배반, 그 혹독한 고통, 그 완전한 외면... 진실로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일을 그분은 전혀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단지 평화를 말하고, 도리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4. 그분은 오시되 ‘용서’로 오신 겁니다. 그분은 오셨고, 용서하신 겁니다. 그래야 이 사건이 납득이 됩니다.
제자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부활이라는 신비로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정작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수가 다시 오신 뒤에도 누구도, 단 한 사람도, 책망받거나 정죄하거나 복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몸이 굳어진 것은, 죽은 사람이 걸어 다니고 말을 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은 물론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그 멋진 소식을 듣고 그들은 몸이 굳어졌습니다. 그들에게 빈 무덤과 부활의 소식은 한편으로는 재앙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 그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요? 놀랍게도 그분은 오셔서,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위험을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죄책감, 불안, 두려움, 거짓! 일순간에 그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정상이 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떤 기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영어인데, 이해하기 편하게 우리가 기도하는 식으로 조금 각색해서 전해드립니다. 듣기만 하세요. ‘하나님. 우리 병사들이 자비를 베풀 가치가 없는 자들을 향해 압도적인 폭력을 가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총알이 적에게 명중하게 해주십시오. 위대하고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간구드립니다.’ 이 기도는 미국의 국방장관 피트 헤그세스가 이란과의 전쟁을 두고 공식 석상에서 드린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사상 최초로 미국인으로서 교황에 선출된 레오 14세 교황은 바로 이런 논평을 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겁니다. 예수는 무장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전쟁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이렇게나 다르게 고백하네요. 전쟁에 예수님을 동원하는 자와 평화의 예수님을 전하는 자, 여러분이 믿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성서는 부활의 주님이 어떤 분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부활, 그것은 용서의 사건입니다. 부활, 그것은 평화를 물으시는 주님의 살아나심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핵심! 그것은 신비가 아니라 용서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받은 그들은 비로소 성령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는 빈 무덤을 채워가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사명’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용서라는 화분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래서 용서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부활주일의 핵심은 바로 ‘용서’입니다. 우리 용서하십시다. 우리 용서를 구합시다. 회개요. 용서의 고백 없는 공동체는, 용서가 없는 공동체는 부활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용서를 위해 백번이고 기도하십니다. 그 위에 평화가 세워집니다. 우리에게 부활의 삶을 주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 은진교회가 부활의 공동체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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