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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잃은 양 한 마리의 역설 / 사순절 둘째주일 장본 목사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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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잃은 양 한 마리의 역설

 

사순절 둘째주일

20240225

 

예레미야 31:10-14

10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11 그렇다. 나 주가 야곱을 속량하여 주고,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그를 구원해 냈다.

12 그들은 돌아와서 시온 산 꼭대기에서 찬송을 부르고, 주의 좋은 선물,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양 새끼와 송아지들을 받고 기뻐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은 물 댄 동산과 같아서,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13 그 때에는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놓고,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서 기뻐할 것이다.

14 그 때에는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것이며, 내 좋은 선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베드로전서 2:18-25

18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22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23 그는 모욕을 당하셨으나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난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않으시고, 정의롭게 심판하시는 이에게 다 맡기셨습니다.

24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누가복음 15:1-7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5 찾으면, 기뻐하며 자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와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 설교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이고, 동시에 3.1절기념주일이에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는 역사 이야기를 좀 해 줄까 해요. 바로 3.1운동에 대해서요. 아마 여러분 역사책을 통해 3.1운동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거에요.

 

1910년에 우리나라 주권은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지요. 1910년이 경술년이었어요. 그래서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적이 사건이라고, 경술국치라 부르지요. 그로부터 10년 뒤 1919년 초에 조선의 종교 단체와 학생들이 31일에 전국적인 민족 운동을 벌이기로 준비합니다. 그래서 민족대표 33명을 선정해서 독립선언서를 만들고 일본 몰래 전국에 인쇄하여 배포하게 되지요. 이때 인쇄한 부수만 35천 부랍니다.

 

31, 33인 민족대표 중 29명이 지금의 서울 종로에 있는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합니다. 지금의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시민들은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지금의 경신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원의 한 학생이 미리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되지요.

 

그리고는 전국적으로 만세 운동이 벌어지게 됩니다. 훗날의 통계이지만,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최소 100만 명에서 2백만 명 가까이 된다고 해요. 7천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45천 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700채가 넘는 집이 불에 탔고, 47개의 교회가 불탔습니다. 학교도 두 곳이나 됐지요.

 

이후 19194월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본격적인 항일운동,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3.1운동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를 말씀드릴께요.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세운동이었다는 거죠. 당시 모든 종교 단체가 힘을 합하여 만든 시민운동이라는 거죠.

 

3.1운동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리고 오늘 어린이-청소년들은 구약의 말씀까지 한 번 집중해서 들어보세요. 구약에서는 민족대표 중 기독교인이 많았던 이유를 전할 거거든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랑하셔서 훗날 독립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구약의 말씀으로 넘어갑니다.

 

 

0.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단이 제정한 3·1절기념주일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가장 비슷한 점은 나라가 위치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공격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변 나라들의 공격에 살아남은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죠. 두 나라 모두 주권을 빼앗긴 적이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성서에 나오는 구약의 말씀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주권을 빼앗긴 경험을 공유했다는 이유로 말이죠.

 

가슴 아픈 경험을 함께 나눈 사람들은 묘한 연대감이 생깁니다. 암에 걸린 사람의 마음은 걸려본 사람이 더 잘 이해하는 거죠. 전쟁에서 가족을 상실한 경험을 한 사람의 심정은 다른 전쟁을 바라보며 같은 경험을 할 사람들을 걱정합니다. 실연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사람의 아픔을 더 잘 들여다보지요.

 

그래서 나라를 빼앗긴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묘한 연대감이 있습니다. 그 시기가 이천 년을 넘었더라도, 내가 사는 지금,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현재라는 것이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지금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릅니다.

 

1. 오늘 구약의 말씀은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10절에 나오는 뭇 민족들은, 여러 이방 민족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께서 뭇 민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110절입니다.

 

10 “뭇 민족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듣고, 먼 해안지역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 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 주신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본 뭇 민족들에게 이제 다시, 나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과 그 유다를 다시 모으고 지킬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11절은 10절의 약속에 대한 근거입니다. 지금 멸망한 그들은 내가 야곱보다 더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한 이들이기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을 구원했듯이 나 하나님이 다시 구원할 것이라는 거죠.

 

12절부터는 다시 구원받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12절 마지막 다시는 기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13절 뒷부분 그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14절 마지막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겠다

 

멸망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믿고 힘을 낼 수 있었지요. 그런데 1919년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우리도 있었습니다. 191931, 3·1만세운동을 준비한 사람들이 모두 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전에 말씀드렸지요. 33인 민족대표 중, 기독교가 16, 천도교 15, 불교 2명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에 전파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민족대표 서른세 명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었을까요? 왜 그들은 죽을 수도 있는 그 독립의 길을 먼저 걸어갔을까요? 선조들은 분명, 우리가 읽었던 예레미야서의 하나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조선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훗날 이루어지게 되었지요.

 

은진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시간을 넘어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과 유다를 새롭게 세워주신 그 하나님께서 80여 년 전 이 나라를 구원해 주셨고, 앞으로도 나와 은진교회와 이 세상을 지켜 주심을 믿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 제가 예전 설교에서 베드로전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공동체에 소망의 서신이라 불리며, 공동체가 힘들 때마다, 이단으로부터 공격받을 때마다, 신앙적으로-신학적으로 든든히 서가는 기준이 되는 서신서라고요.

 

그래서 베드로전서를 읽을 때는 기본 전제를 하고 읽어야 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은 이단에게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지쳐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사실을요. 이 중요한 전제를 잊고 베드로전서를 읽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해석을 하게 된다고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복음을 듣는 여러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 218절에서 25절은 당시 사회 구성원 중 종에게, 31절로 7절은 특별히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8절 이하는 전체 회중에게 구체적인 신앙의 지침을 전합니다.

 

그중 오늘 본문은 종들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죠. 가장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 베드로전서 218절입니다.

 

18 하인으로 있는 여러분, 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량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얼핏 잘못 생각하면, 종의 처지를 받아들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허나 오늘 본문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 19절입니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아름다운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입니다. 신약성서에서 대부분 은혜라고 번역하는 단어지요.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은혜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상황을 하나님,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아내면 그것이 은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잘 납득가지 않지요. 한 절만 더 보겠습니다. 20절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 중요한 전제가 있었군요. 아름다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군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 즉 은혜가 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왜 그럴까요? 왜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이 될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21. 아주 중요합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은진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 본을 남기신 거라고요. 그 예수님이 선을 행하면서도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요. 그래서 그 죽음이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일, 곧 은혜가 되었다고요.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은혜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2절 이하는 오늘 오후 성서학당에서 풀어드릴게요. 대신 마지막 25절만 읽고 복음서로 넘어가겠습니다. 25절입니다.

 

25 전에는 여러분은 길 잃은 양과 같았으나, 이제는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이며 감독이신 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길 잃은 양에서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온 인생이 되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복음서의 말씀은 그 유명한 잃은 양의 비유입니다. 내용은 다 아시지요. 양 백 마리 키우는 목자가 한 마리를 잃었는데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아마도 수백 번 들었음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발걸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죠.

 

그럼 양 아흔아홉 마리는 그냥 둬도 되는 겁니까?’ 그래요. 아흔아홉 마리 양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요?

 

솔직히 우리 마음을 좀 들여다 보십시다. 여러분은 아흔아홉 마리에 속한 양입니까? 잃은 한 마리에 속한 양입니까? 아마도 지금 은진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주일마다 함께 은혜 가득한 예배를 드리는 우리를, 나를 잃은 양 한 마리라고 생각하는 교우는 없을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지도 꽤 오래되었고, 예수님을 구원자라 이미 고백한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 속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틀린 말은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그 발걸음이 비효율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경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발걸음을 아흔아홉 마리의 양에게 미친다면 그들이 더 큰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니까요.

 

그런데 우리, 이렇게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내가 그 잃은 양 한 마리라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내가 언젠가 잃은 양 한 마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그 심정을 이 시대를 극도의 외로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처절한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소외당하는 사람들이라고 대입해 본다면 그래도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서 누가복음 151-3절입니다.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누구에게 말씀하시나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지요.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지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지요. 바로 아흔아홉 마리에 양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그 말이 의미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백 마리 모두 목자의 양입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목자의 양이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한 마리가 1절에 나오는 세리라도, 죄인이라도 나 예수는 회개할 필요없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주의자들 너희를 두고서라도 찾아 나서겠다는 말씀입니다.

 

3. 은진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차별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주의자들과 싸우셨습니다. 너희가 차별하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이지요.

 

우리가 처음부터 성도는 아니었지요. 우리는 모두 처음에는 잃은 양 한 마리였을 뿐입니다. 선을 행하시며 고난 당하시고, 우리에게 따를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만나, 이제 겨우 아흔아홉 마리의 양의 무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이 험한 세상 살다가 아흔아홉 마리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도 참 많지요. 아직도 잃은 양 한 마리의 처지인 사람들도 있지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내가 잃은 양 한 마리가 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래야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주님의 발걸음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선한 일을 하시고도 고난받아 죽음에 이른 그 예수님의 아픔을 이 사순절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품어야만 80여 년 전, 우리를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둘째주일. 우리 주변에 차별당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이 사순절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그들을 찾는 발걸음이 되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여 우리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온 마음으로 지지하고,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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