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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회복을 위한 성찰 / 사순절 셋째주일 장본 목사 202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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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회복을 위한 성찰

 

사순절 셋째주일

20240303

 

호세아 14:1-9

1 이스라엘아, 주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네가 지은 죄가 너를 걸어 거꾸러뜨렸지만,

2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3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4 “내가 그들의 반역하는 병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이제는 다 풀렸다.

5 내가 이스라엘 위에 이슬처럼 내릴 것이니, 이스라엘이 나리꽃처럼 피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다.

6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올리브 나무처럼 아름다워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향기롭게 될 것이다.

7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것이다. 포도나무처럼 꽃이 피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유명해질 것이다.

8 에브라임이 고백할 것이다.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응답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나는 무성한 잣나무와 같으니, 너는 필요한 생명의 열매를 나에게서 언제나 얻을 수 있을 것이다.”

9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다.

 

요한일서 1:8-10

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누가복음 15:11-32

1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12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14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15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17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19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25 그런데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데,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를 듣고,

26 종 하나를 불러서, 무슨 일인지를 물어 보았다.

27 종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반겨서, 주인 어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 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와서 그를 달랬다.

29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31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32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 설교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주일마다 예배드릴 때, 우리가 매번 하는 순서 하나를 설명해 주려고 해요. 바로 예배 순서 앞에 있는 참회기도와 용서의 선언에 대해서요.

 

목사님이 참회기도할 때 매번 이렇게 말하죠. “이 시간, 우리가 살면서 지은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참회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이 시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런 생각해 본 적 있을 거에요. ? 나는 이번주에 별로 잘 못한 일이 없는 같은데, 이번 주에는 난 착한 일만 했는데, 이렇게 말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참회기도 시간은 나에게 의미없는 시간이 될 수 있지요. 아마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럼 우리는 왜 주일세대통합예배마다 참회기도를 드리는 걸까요?

 

기독교에는 죄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리, 교회의 원리가 있어요. 그걸 어려운 말로 하면 원죄론이라고 해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은 하나님 앞에 모두 죄가 있어요. 이 부분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설명해 줄께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죄인이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죠. 기독교에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신 분을 예수님이라고 말해요.

 

우리가 사순절을 지내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거든요?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신 사하여 주시기 위한 죽음이었다고 믿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원자,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의인이 된 거죠.

 

중요한 것인 이제부터에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의인이 된 우리,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의롭지만은 않은 거죠. 정의로운 세상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도 있고, 평등한 세상도 있지만 차별하는 세상도 있는 거에요.

 

그런 다양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일주일의 삶을 좀 돌아보는 것이 참회기도의 목적이랍니다. 일주일 동안의 내 삶을 짧은 시간이지만 돌아보자. 그랬더니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온 나의 여러 행동이 보이더라는 거죠. 예배 때는 그런 마음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거죠.

 

참회기도는 우리가 죄인이어서 드리는 기도가 아니랍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기도에요. 그래서 이를 통해 더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드리는 기도랍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른들보다 기본적으로 순수해요. 깨끗해요. 그래도 예배 때 참회기도를 드리면서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신앙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0.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지난주 사순절 둘째주일 말씀 중, 복음서에서 우리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는 무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었지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는 무리와 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그들은 죄인과 세리들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나는 죄인과 세리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러 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들도 내 양이기 때문이다라고요.

 

이 시간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여러분은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답은 셋 중 하나이겠지요. 첫 번째 답, 나는 죄가 없습니다. 두 번째 답, 나는 죄가 있습니다. 세 번째 답,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대답을 하시든 좋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어보시고, 내가 내린 답에 대해 스스로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1. 구약의 말씀입니다. 호세아의 마지막 장 전체입니다. 호세아는 구약 성서에 나오는 예언자 중 보기 드물게 북왕국 이스라엘 출신 사람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번영했던 도시는 사마리아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혼란했지요.

 

기원전 787년경부터 25년 동안 북왕국에는 여섯 명의 왕이 등장했고, 그중 네 명의 왕이 암살되었습니다.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렇게 혼란을 거듭하다가 북왕국 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기원전 750년경부터 북왕국이 멸망하기까지 활동한 예언자가 바로 호세아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우상숭배입니다. 북왕국은 수도 사마리아의 성소에서조차 가나안의 다산 신들을 섬겼습니다. 호세아는 그 부분에 대한 잘못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라 말합니다. 아직 희망은 있었거든요. 그 마지막 희망의 호소가 오늘 본문 호세아 14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고백하라 합니다. 142절입니다.

 

2 너희는 말씀을 받들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이렇게 아뢰어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수송아지를 드리는 대신에 우리가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북왕국에는 또 하나의 죄가 있었습니다. 주변 강대국과 연합전선을 펼친 것이지요. 동맹을 맺은 겁니다. 왜요? 그 강한 나라의 힘을 의지하려고요. 그렇게라도 살아남으려고요.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죄였습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 중 하나였지요. 3절입니다.

 

3 다시는 앗시리아에게 우리를 살려 달라고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군마를 의지하지도 않겠습니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고백하지도 않겠습니다. 고아를 가엾게 여기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첫째 우상을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둘째 주변 나라와 연합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 주실 테니까요. 이제까지 살아온 과거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그것이 먼저입니다. 당신들이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4절부터 눈으로 따라오십시오.

 

4절 중간, 내가... 기꺼이 그들을 사랑하겠다. 그들에게 품은 내 분노를 풀겠다.

5절 중간, 이스라엘이 꽃처럼 피고, 이스라엘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6, 그 나무에서 가지들이 새로 뻗고, 아름다워지고, 향기롭게 될 것이다.

7, 그들이 다시 내 그늘 밑에 살면서... 거둘 것이고, 꽃이 피고, 유명해질 것이다.

8, 이렇게만 고백하라. ‘나는 이제 우상들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나 하나님이 내가 너를 지켜 주마.’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주시는 말씀 9절입니다.

 

9 지혜로운 사람은 여기에 쓴 것을 깨달아라. 총명한 사람은 이것을 마음에 새겨라. 주님의 길은 올바르다. 의로운 백성은 그 길을 따라 살아가지만 죄인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다.

 

회복의 핵심은 깨달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알았으면 마음에 새겨야지요. 이스라엘의 길이 죄의 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죄는 깨달을 때, 비로소 가 보이게 됩니다. 주님의 길이 올바르다고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나의 죄를 보지 못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먼저 해야 할 일, 죄를 깨닫는 일,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헤아리는 일입니다. 그래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서두에 여러분에게 드린 질문의 답을 내릴, 첫 번째 힌트이기도 합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이 사순절, 하나님의 마음을 바로 헤아려 올바른 주님의 길을 지혜롭게, 총명하게 마음에 새기는 의로운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서신서의 말씀은 어디에서 많이 들어본 말씀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매주 예배 때 듣는 구절이지요. 언제요? ‘참회기도와 용서의 선언때입니다. 반주에 맞춰 참회기도를 하고 제가 늘 읽어드리는 말씀이 오늘 서신서 본문의 9절입니다.

 

요한일서 18, 9, 10절은 똑같은 형식으로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이렇게 말입니다. 국어에서는 이러한 표현을 가정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던 이단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신천지처럼요. 바로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8절로 10절의 앞 표현은 영지주의의 표현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죠.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이었지요. 공동체는 이단에 맞서야 했습니다. 우리 지금도 그러잖아요. 어떻게 반박했을까요? 8절로 10절을 모두 읽어봅니다.

 

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영지주의는 그들이 말하는 지혜에 이르면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는 죄보다 영지, 신령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던 거죠. 영지만 얻게 되면, 죄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사귐은 나의 성찰과 수행을 통해서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 사이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쉬운 말로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 일상의 삶이 호세아 선지자가 말했던 올바른 하나님의 길일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일상은 기대와는 달리 차별이 난무하는 삶, 왜곡이 난무하는 삶, 원망과 질투가 난무하는 삶일 때가 많지요. 그 삶을 우리는 살아가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 되는 겁니다. 가끔은 저 인간을 지그시 밟으며 살아왔거든요. 그러면서 스스로 모른 척하는 거죠. 8절에 진리를 저버린다는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주 예배 앞부분에 참회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일상에 삶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조차 모르게 밀어붙이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면, 다시 한 번 읽습니다. 9절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서론에서 드린 질문의 두 번째 힌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우리의 불의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거짓말로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싶다고 기도하지요?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비법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그 뜻을 깨달아 깨끗함을 입어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가 동행함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오늘 복음서의 말씀, “잃은 아들의 비유이지요. 우리나라 정서로 보자면, 둘째 아들이 못난 짓을 했네요. 아비에게 미리 유산 달라고 하고,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네요. 하는 수없이 집으로 돌아오네요. 그랬더니 이번엔 형이 난리가 났네요. 호적 파고 나갔던 놈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오냐고 하네요. 그런 놈한테 다시 좋은 옷 입혀 준 아버지에게 뭐라뭐라 하네요. 그 아버지 참 힘들겠어요. 두 녀석 다 내 자식인데 한 놈은 거지꼴로 돌아오고, 한 놈은 받아 준다고 난리이니 말이죠.

 

이 비유는 지난주 비유에 이어서 나옵니다. 그러니 이 비유의 수신자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주의자들이지요. 비유는 수신자를 빼고 해석하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심지어 이 비유가 재산을 죽기 전에 나눠주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교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제부터 잘 들어보세요.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양한 세상도 있지요.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에 있으면 시민으로서 어깨 펴고 살아갑니다. 편안하지요. 그런데 해외여행 가보셨지요? 말 안 통하는 이유 하나로 외국에 가면 공항에서부터 괜히 주눅 듭니다. 불편하지요.

 

우리나라에 300만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습니다. 심정으로야 그들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들이 우리나라의 3D 업종에서 저임금으로 일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미등록이주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의 주요 노동력입니다. 하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캘리포니아에서 그들은 어깨를 펴고 살지 못합니다. 그들이 자기 나라로 가면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텐데 말이죠.

 

같은 대한민국 시민이라도, 대학생과 교수 사이에는 묘한 힘의 차이가 있습니다. 학생의 성적을 주는 사람이 교수니까요. 용의자와 변호사 사이에도 묘한 힘의 차이가 있어요. 그 변호사가 변호를 잘못해 주면 안 되니까요. 교회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습니다. 30년 한 교회를 다니던 교우와 이제 1년도 안 된 교우가 대화하는 것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지요. 모두 같은 대한민국 시민인데 처한 상황에 따라,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상대방과 주고받는 영향력이 달라집니다. 성별에 따라서도 다르고, 나이에 따라서도 다르고, 사람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도 다 다릅니다.

 

비유에서 둘째 아들요. 못난 짓 했지요. 돈 좀 있다고 다른 지역 가서 행세 좀 했지요. 돈 떨어지니 외국인노동자, 미등록이주민 신세 됐지요. 자기 삶을 상실하게 되었네요. 집에서는 부잣집 둘째 아들이었거든요. 죄인 신세로 집으로 돌아왔네요. 잘못했다고 빌기까지 하네요. 그냥 종으로라도 살았으면 좋겠어요. 먹을 수는 있잖아요.

 

첫째 아들요. 동생 못난 짓에 울분을 참아가며 집에서 아버지를 섬겼네요. 늘 그렇듯 그 사회가 원하는 장남으로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네요. 참 바르게 컸네요. 그런데 이 녀석이 돌아와 버렸어요. 나갈 때는 언제고 게다가 거지꼴로 돌아오다니요. 너 때문에 아버지 고생한 거 생각하면, 나 고생한 거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어요. 삶의 상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지가 잘못해서 저런 건데 누굴 탓해요?

 

더 화가 나는 건 아버지의 태도에요. 쫓아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새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벌인다네요. ~ 나는 그 녀석 몫까지 죽으라고 일만 했는데요.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 말씀해도 분이 풀리지 않네요. 저 녀석 때문에 내가 힘들게 지켜온 삶이 무너지게 생겼다고요.

 

아버지요. 자식 잘못 키워서 둘째가 저 모양으로 나갔어요. 동네 창피해서 얼굴도 못 들고 다녔어요. 첫째 눈치는 왜 이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내 삶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도 아비이니 꿋꿋하게 살아야지요. 그런데 그 녀석이 왔어요. 꼴을 보니 망했더군요. 괜찮아요. 살아있으니 되었어요.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에요. 그래도 무릎 꿇고 비는 것 보니 세상 좀 배우고 오긴 한 모양이네요. 그저 다행이에요.

 

그런데 둘째가 돌아오니 첫째가 심상치 않아요. 넌 괜찮았잖아. 잘 지내고 있었잖아. 잘 먹고, 잘 살고 있었잖아. 그런데 동생이 왔는데 왜 그래? 아이고... 상처가 컸었네요. 그래도 나 죽으면 이게 다 니껀대. 어떻게 안 되겠니? 사는 게, 사는 게... 참 그래요. 그래도 내가 아비이니 감당해야겠죠?

 

이 비유는 이렇게만 풀어드립니다. 둘째 아들 죄인, 첫째 아들 바리새파 사람들, 아버지는 예수. 이런 식으로 대입하지 마세요. 대신 삶의 관점으로 보세요.

 

자신의 잘못이긴 했지만 삶을 상실한 사람이 있어요. 거지꼴이 된 그제야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를 아무 말 없이 다시 아들로 세워주는 아비가 있습니다. 그 아비는 둘째 아들의 상실했던 삶을 회복시켜 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회의를 느끼는 첫째 아들도 있습니다. 아비 생각에는 동생이 돌아왔다고 첫째 아들 삶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진 데,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긴 양 화를 냅니다. 동생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묘한 긴장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첫째 아들의 마음, 원망과 질투가 아닐까요? 동생은 나와 다르다는 차별이 난무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이 아비는 다 보이는데, 다 알겠는데 이 두 자식은 내 마음을 몰라 주네요. 그렇게 이 비유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말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순절 셋째주일. 우리는 육신의 삶을 상실해가는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죽음으로 걸어가시는 그 길을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이상한 것은 예수님은 죽음으로 걸어가시는데, 우리의 삶은 회복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고난으로 걸어가시는 데 우리는 은혜로 고난을 이겨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까지 모두 짊어지며 십자가로 나아가시는데, 우리는 구원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은진교회 성도 여러분. 서두의 질문을 다시 드립니다. 여러분은 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이 질문에 여러분이 스스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을 회복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구원의 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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