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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부활 / 부활절 둘째주일 장본 목사 202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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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부활

 

부활절 둘째주일

20240407

 

민수기 9:15-23

15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성막, 곧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덮었다. 저녁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불처럼 보였으며, 아침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16 그것은 늘 그러하였다.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으며, 밤에는 그 구름이 불처럼 보였다.

17 구름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에 길을 떠났고, 구름이 내려와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쳤다.

18 이스라엘 자손은 이렇게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고, 또한 주님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날 동안에는, 진에 머물렀다.

19 그 구름이 성막 위에 여러 날 동안 오래 머물면,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의 명을 지켜 길을 떠나지 않았다.

20 구름이 성막 위에 며칠만 머무를 때도 있었다. 그 때에는 그 때대로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진을 치고, 또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나곤 하였다.

21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러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아침이 되어 구름이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낮이든지 밤이든지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그들은 길을 떠났다.

22 때로는 이틀이나 한 달이나 또는 몇 달씩 계속하여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으면, 이스라엘 자손은 그 곳에 진을 친 채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구름이 걷혀 올라가야만 길을 떠났다.

23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분부하신 대로,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

 

사도행전 26:12-18

12 “한번은 내가 이런 일로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과 위임을 받아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13 임금님, 나는 길을 가다가, 한낮에 하늘에서부터 해보다 더 눈부신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14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5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16 ,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17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18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1-12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4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6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뒤에,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그에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 눈먼 사람이 가서 씻고, 눈이 밝아져서 돌아갔다.

8 이웃 사람들과, 그가 전에 거지인 것을 보아 온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아니냐?” 하였다.

9 다른 사람들 가운데는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하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고, 또 더러는 그가 아니라 그와 비슷한 사람이다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하고 말하였다.

10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소?”

11 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소.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소.”

12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다.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 설교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부활절을 지냈어요.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날을 기리는 날이지요. 목사님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가 바로 부활절이라고 했는데, 오늘은 왜 부활절이 우리에게 중요한 날인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우리는 모두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죽음이라는 건 우리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죽음이라고 하지요.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지요. 하지만 우리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면 다시 살아나지 못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건 우리도 죽었을 때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건 아니랍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매해 이맘때 부활절을 지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의 삶이 다시 살아나는 삶,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해요. 좀 어렵죠? 살아있는 사람의 부활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부활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서신서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와요. 바울은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180도로 바뀌게 돼요.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들이던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거죠.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 부활이란 이런 거에요. 나의 삶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순간부터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거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살았던 내가 내 주변 사람들도 같이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친구를 나 몰라라 하던 내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친구를 돕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달라지는 삶의 방향성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거죠. 힘없는 사람들을 아는 척하지 않던 내가 예수님 만나서 그들을 기억하게 되는 거죠. 늘 부모님께 떼쓰던 내가 부모님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는 거죠.

 

이런 삶의 변화를 살아있는 사람들의 부활이라고 한답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매해 이날을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고민하기 위해서랍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 주님께 기도해 보는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려고 노력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이 자라게 될 거예요. 지금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을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것이 여러분이 부활에 이르는 길이랍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사셨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하고, 나도 다른 친구들을 위해 서로 돕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0.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둘째주일입니다. 오늘은 세 본문 순서를 바꿔, 복음서-서신서-구약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눕니다.

 

우리는 지난주 부활주일 세대통합예배를 드렸습니다. 성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다시 사셨다고 전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하는데, 사실 부활의 의미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 부활하셨다니까 하셨겠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함께 읽었던 세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참 부활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견고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한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행색은 거지에 하는 일도 앉아서 구걸하는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복음 92절입니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냐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눈 못 보는 것을 어떤 이유에 대한 결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벌로 눈이 멀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인가에 관심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은 죄 때문인가?”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3절입니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결하지만,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한순간에 한 사람의 운명을 복음으로 전환하는 장면이지요.

 

제자들에게 눈먼 사람의 인생, 그것은 죄 값을 치르는 인생이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 눈먼 사람의 인생을 하나님을 향한 삶으로 한순간에 전환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말 뿐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눈먼 사람을 회복시킵니다.

 

교우 여러분. 눈먼 사람이 눈을 뜨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복이며, 부활이지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을 뜬 사람은 자신이 보게 되었다는 것,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즉 자신의 부활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눈먼 사람에게는 눈 뜸이 참 부활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눈먼 사람을 봐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을 보게 된 사람에게 이렇게 묻지요. 12절입니다.

 

12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하고 대답하였다.

 

당신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어디 있소?”라고 묻습니다. “진흙을 개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씻어서 나았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 어디 있냐?”고만 묻습니다. 먼저 축하한다고, 정말 잘 되었다고 말 한마디 건넬 수도 있을 텐데 사람들은 눈먼 이를 고쳐준 사람만 찾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말 잘 기억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내 눈앞에서 그동안 눈멀어 거지 행세하던 사람이 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먼 사람은 진짜 눈을 뜨고 다닙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납니다. ‘! 예수만이 살길이구나그래서 일단 예수부터 찾습니다. 나는 두 눈 멀쩡한데 말이죠. 안 보려고 해도 이 세상 것들이 너무 잘 보이는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죠. 눈먼 사람이 눈 뜬 것을 진짜 보니까 나는 두 눈이 다 보이는데도 예수님을 찾는 겁니다. 눈먼 사람에게는 복음이었던 눈뜸이, 부활이었던 눈뜸이, 사람들에게는 예수만나 팔자 한번 고쳐보려는 탐욕과 욕심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예수 따르는 삶을 사는 우리들, 두 눈 멀쩡히 뜨고 있고 사지 멀쩡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눈으로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겁니다. 멀쩡한 팔다리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선택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왜냐면 우리가 존재하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시려고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에게 나타내시려고!!” 말입니다.

 

두 눈 다 볼 수 있고, 팔다리 멀쩡한 사람들이 눈을 고쳐준 예수를 찾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그 눈먼 사람에게처럼 뭔가 해달라는 욕심의 발길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발길과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욕심의 발길은 예수를 슈퍼스타라고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믿음의 발길은 예수를 그리스도, 구원자라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내 생각대로 예수님을 원하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주후 60년경, 예루살렘 지역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부임합니다. 베스도라는 총독이지요. 대제사장들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고발하고 예루살렘으로 불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당시 바울은 가이사랴라는 지역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암살할 계획을 세운 거지요.

 

바울은 예수님과 비슷한 길을 걷습니다. 바울에 대한 대제사장과 유대 지도자의 고발은 집요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때처럼 증거를 대지는 못합니다. 자기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으니 그저 악다구니를 쓸 뿐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지요. 그래서 자신의 신분을 적극 이용합니다. 저들의 고발에 바울은 자신이 로마 황제에게 직접 상소합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그럴 수 있었거든요. 아무리 심문을 해도 죄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를 심문하는 아그립바 왕과의 대화가 오늘 사도행전 본문입니다.

 

이 대화에서 바울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잘 나가는 바리새파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데에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찬성했다는 사실까지 시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고 말합니다.

그랬던 바울이 다시 태어납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이유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 대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가지고 가는 길이었지요. 사도행전 2614, 15절입니다.

 

14 우리는 모두 땅에 엎어졌습니다. 그 때에 히브리 말로 나에게 사울아, 사울아,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하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15 그래서 내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부족할 것 없었던 바울이었기에, 더는 바랄 것도 없을 만큼 가진 그였기에 바울은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부족할 것 없는 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입니다. 하지만 이젠 그 반대가 되었지요.

 

두 눈 멀쩡하게 뜨고 다니던 바울이, 예수에 눈먼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자기의 눈에 예수밖에 안 보이니까 이제 다른 것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앞을 보는 사람의 부활이 여기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하시는 일을, 나를 통해 드러내시기 위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럼과 동시에 두 눈 멀쩡한 사람을 예수에게 눈을 멀게 하십니다. 이것 또한 부활입니다. 16절입니다.

 

16 , 일어나서, 발을 딛고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목적은, 너를 일꾼으로 삼아서, 네가 나를 본 것과 내가 장차 네게 보여 줄 일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앞을 보는 사람의 부활도 하나님의 목적은 같습니다. 당신의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요. 눈먼 사람이나, 눈 뜬 사람의 부활에 대해, 하나님의 목적이 같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간절히 원하기는 우리도 말씀으로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목적인 증인으로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오늘 설교 제목은 참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이 이라는 단어, 아주 중요합니다. ‘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접두사로 사용하고 뒤에 오는 명사를 규정합니다. ‘진짜’,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상태가 좋은 물건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의 반대말이 무엇일까요? 수학에서는 거짓이라고 배웁니다. 그런데 참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입니다. ‘좋은 것이 아닌 것’, ‘함부로 된 것을 뜻하죠. 참말, 참꽃, 개떡, 개꿈 이렇게 사용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 을 남발하는 세상입니다. 그 증거를 거리에 간판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죠. 옛날에는 숯불갈비간판이었는데, 가짜 숯이 하도 많이 나오니까 간판에 이렇게 씁니다. “참 숯불갈비라고요. 그것도 못 믿어서 이제는 참 앞에다가 원조를 붙이기도 하고, ‘진짜라는 단어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참이라고 해도 믿지 않는 세상.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우리 삶에서 참 부활로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일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수기 9장에서 그 옛날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여준 신앙을 통해 그 본을 보여주십니다.

 

민수기 9장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미련하리만큼 행동합니다. 성막 위 구름이 걷혀야만 길을 떠났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면 그곳이 어디든 그 자리에 진을 칩니다.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사흘도, 열흘도, 몇 달이건 간에 그곳에 머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리 한 이유가 민수기 923절에 나옵니다.

 

23 이렇게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진을 쳤고, 주님의 지시에 따라 길을 떠났다. 그들은,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분부하신 대로, 주님의 명령을 지켰다.

 

주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단순 무식한 복종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 무식한 신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끊어지지 않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명령 앞에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무모하리만큼 단순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순종, 그것은 무식하고 무모한 것이 아닌, 그들의 순수한 신앙이고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켰던 순수한 신앙과 잘 나가던 사도 바울의 눈을 멀게 하셨던 예수님, 눈먼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 그리고 그 사람의 눈뜸까지...... 여기에서 우리는 참 부활의 세 가지 핵심을 볼 수 있습니다.

 

4. 첫째 하나님의 명령을 순수한 마음으로 따르십시오!” 얼만큼요? 무모하리만큼! 바보처럼 보일 만큼!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다른 건 몰라도 하나님 명령에는 진심으로 순종하는 은진 교우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뒤집어 집시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인생은 뒤집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전까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는것임을 알았다면, 아프다고 주저앉아 있을 것 아니라, 딛고 일어서서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누구처럼요? 바울처럼요.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바울을 눈멀게 했던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참 부활의 마지막 핵심은 눈먼 사람에게까지 보여주신 그 기적, 보이지 않는다면 눈을 뜨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게 하시려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척 말고 정말 믿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교회를 부활시킨다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개떡 같다고 말하죠. 온 교회가 개떡 같다고 말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개떡 같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운 것도, 절망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진정한 참 부활을 이룬다면 그때부터 세상은 참 부활의 희망을 안고 있는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참 부활은 개떡 같은 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일이 잘되고 있고, 승승장구하고 있고, 잘 나가고 있어도, 나의 참 부활은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은진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능력을 믿고, 그분을 사모하는 성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 말씀으로 참 부활하여 믿고, 뒤집어져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그 역사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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