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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 20240616 장본 목사 20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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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성령강림후 넷째주일

20240616

 

룻기 1:8-18

8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제각기 친정으로 돌아가거라. 너희가, 죽은 너희의 남편들과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주었으니, 주님께서도 너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빈다.

9 너희가 각각 새 남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기를 바란다나오미가 작별하려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니, 며느리들이 큰소리로 울면서

10 말하였다. “아닙니다. 우리도 어머님과 함께 어머님의 겨레에게로 돌아가겠습니다.”

11 그러나 나오미는 말렸다.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고 하느냐? 아직, 내 뱃속에 아들들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이 너희 남편이라도 될 수 있다는 말이냐?

12 돌아가 다오, 내 딸들아. 제발 돌아가거라. 재혼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늙었다. 설령, 나에게 어떤 희망이 있다거나, 오늘 밤 내가 남편을 맞아들여 아들들을 낳게 된다거나 하더라도,

13 너희가, 그것들이 클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 그 때까지 재혼도 하지 않고, 홀로들 지내겠다는 말이냐? 아서라, 내 딸들아. 너희들 처지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롭구나.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신 것이 분명하다.”

14 그들은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내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맞추면서 작별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그러나 룻은 오히려 시어머니 곁에 더 달라붙었다.

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3:23-29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8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29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약속을 따라 정해진 상속자들입니다.

 

요한복음 4:7-26

7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가서, 그 자리에 없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

12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15 그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16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

17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22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민족, 인종에 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민족과 인종은 달라요. 민족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공동생활을 하면서 공통된 언어와 문화를 만든 무리를 뜻해요. 예를 들어 한민족, 독일민족 이렇게요. 인종은 사람을 신체적, 사회적 특징으로 구분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피부색으로 사람을 나누는 거지요.

 

분명한 차이가 있는 두 단어를 하나로 묶어 설명하는 이유가 있어요. 왜냐면 민족과 인종에 차별이라는 단어를 붙이면, 두 단어가 비슷한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거든요. 이런 말 많이 들었을 거예요. 민족차별, 인종차별요.

 

민족차별은 이런 거에요. 2차 세계대전 무렵 독일민족이 유대민족을 학살했지요. 인종차별은 백인이 흑인을 차별한다고 할 때 사용하죠. 두 차별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자기 민족이, 자기 인종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강한 거죠. 그 우월감이 상대방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학대하기까지 하죠.

 

유대민족, 이스라엘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들만 선택하셨고 이끌어 주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신을 믿는 다른 민족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 사람인데도, 다른 민족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다고 해서 예수님을 모함하고 결국, 십자가에 매달기까지 했답니다. 이렇게 민족에 관한 생각이 너무 강하면 평등하다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게 되죠. 그건 인종에 관해서도 똑같답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누구나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누구든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이잖아요? 그 말의 뜻은 우리가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다른 인종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랍니다. 그래야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되거든요.

 

간절히 원하기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나랑 다른 민족이라고, 인종이라고... 더 나아가 친구들까지도 나와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신앙인으로 커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세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구약 룻기에서는 룻이라는 여성이 나오고, 서신서에서는 갈라디아 공동체 교인들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지요.

 

등장인물의 면면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룻은 모압 사람입니다. 갈라디아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더불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입니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유대 사람이 아니지요.

 

세 본문에 모두 이스라엘 사람, 유대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오늘은 이 지점을 우리가 먼저 알고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유대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나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2. 구약성서의 말씀은 룻기입니다. 룻은 모압 사람이라고 이미 알려드렸습니다. 여성입니다. 모압 출신 여성으로 유대 사람과 결혼하였습니다. 시어머니도 유대 사람이고 이름은 나오미입니다.

 

구약성서에 룻기라는 책이 정경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룻기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왜냐면 룻이라는 여인이 이방 민족 사람이고, 구약의 하나님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압 민족의 한 여성 이름으로 구약성서의 한 책이, 제목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룻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이지요.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 민족순혈주의를 철통같이 지켜내려는 유대 민족의 신앙 가운데 어떻게 룻기가 구약 정경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정리해 드립니다. 나오미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유대 사람입니다. 두 아들은 모압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중 한 사람이 룻입니다.

 

유대 땅에 큰 흉년이 들어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모압 땅으로 이주합니다. 모압 땅에서 십 년쯤 살았는데, 그 사이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남은 사람은 나오미와 두 며느리뿐이지요.

 

떠나온 유대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오미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습니다. 두 며느리도 어머니를 모시고 떠날 채비를 합니다. 나오미에게는 떠나 온 고향 유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두 며느리에게는 고향 땅 모압에서 다시 타향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었죠.

 

나오미는 그런 며느리들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이릅니다. 작별 키스까지 하며 두 며느리를 보냅니다. 하지만 룻과 오르바는 울면서 어머니와 같이 가겠다고 말합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다시 며느리들에게 돌아가라 말합니다. 이에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룻은 끝까지 나오미의 곁을 지키겠다고 서원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 굳센 것을 확인한 나오미는 룻에게는 더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야기로 치자면 남편 잃은 며느리가 역시 홀로된 시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는 당시 전형적인 사회의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사회를 탈가부장제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룻기를 바라보면 시작부터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룻기는 당시 가부장제 사회를 공고히 하기 위해 쓰인 책이 절대 아닙니다. 룻기 116절입니다.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룻은 모압 사람이라 했지요. 이방 민족입니다. 유대 민족 남편을 만나 자신의 고향과 민족을 떠난 사람입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면 먹고 살 수는 있습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면 온갖 멸시와 천대가 기다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남편 없는 유대 사회를 사는 이방 여성의 삶은 당시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룻입니다. 그 룻이 어머니께 드리는 말이 16, 17절입니다.

 

어머니의 겨레, 어머니의 민족이 내 민족이라고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죽는 곳에 나도 묻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로 인해 룻기가 정경이 되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이방 여성 룻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믿음은 용기입니다. 나의 출신, 나의 과거를 두려움 없이 떨치고 나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크나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룻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룻의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2024616일 우리의 하나님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오늘 믿는 하나님이 앞으로 우리의 자녀들과 나의 주변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도시는 오늘날 튀르키예, 구 터키의 앙카라라는 도시 근방입니다.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통해 복음을 접했고, 이후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관심할 부분은 이 공동체의 신도 대부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설교 때 이방인이라고 표현을 하면,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면 훨씬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 곧 우리라고요. 우리가 유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집니다.

 

우리가 유대 사람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데는 분명히 어떤 연결점, 매개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성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 없이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다고 말할 수 없지요. 당시 갈라디아 공동체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 사람만이 믿는 하나님을 이방 민족도 믿게끔 하는 매개체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매개체를 그들은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유대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하나님의 계명들입니다. 믿으려면 계명을 따라야 하지요. 당연합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고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율법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갈라디아서 323절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이상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 율법일 텐데, 우리를 감시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전합니다. 게다가 우리가 율법에 갇혀 있었다고 말하는군요.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메시아가 올 때까지, 우리를 계명 안에 살게 하는 일종의 보호막으로 인식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가 올 때까지 율법을 잘 지켜내는 것이 매우 중요했지요.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오지 않으면서 율법은 오히려 믿음을 지켜내는 사람들을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군요. 24절입니다.

 

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개인교사는 1:1 맞춤 교육을 하는 과외 선생님이지요. 율법이 그런 역할을 해 왔단 말입니다. 학원보다 1:1 과외가 비싸지요. 왜냐면 공부하는 학생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성서에서는 선생의 의미보다는 감시자의 의미로 쓰인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이에요. 25절과 26절입니다.

 

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26 여러분은 모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았습니다. 27절에 나옵니다.

 

27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가 예수임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겁니다.

 

은진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매개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으니까 따르게 되는 겁니다. 믿으니까 기도하게 되는 거고요. 믿으니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예배드리는 겁니다. 믿으니까 율법도 따라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거고요. 우리의 삶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고백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복음서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이후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에게 부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방 민족들과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의 순혈 전통을 깨뜨렸기 때문이지요.

 

유대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수백 년이 흘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지키러 가실 때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의 땅을 거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오랜 적대적 시간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전 북이스라엘로 분열될 때부터 그곳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그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예루살렘을 터부시했습니다.

하여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말을 걸거나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금기사항이었지요. 예수님께서 그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이 오늘 복음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한잔을 청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그가 유대인임을 대번에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는 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복음서의 말씀을 눈으로 따라옵니다.

 

9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왜 유대인인 당신이 물을 달라합니까?”라는 질문에

10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당신이 먼저 물을 주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예수님.

11, 12두레박도 없이 어떻게 물을 드시려고 그러십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는

13, 14난 마시는 물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영생에 이르는 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물을 마셔봐야 다시 목마를 뿐이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사마리아 여인에게 알게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꿰뚫어 보시며, 그가 처한 사회적 위치까지 말씀하시며 말이지요. 예수님이 범상치 않은 분임을 알게 된 사마리아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예수에 관한 의문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19절입니다.

 

19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의문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드리는 예배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이 궁금증은 당시 예배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기도 했지요. 그 논쟁을 확인합니다. 20절입니다.

 

20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서로 드리는 예배가 나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그림심산에서 드리는 예배와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로 말이죠. 유대 사람인 예수님은 분명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옳다고 하셨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이니까 예루살렘의 예배가 옳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배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그 유명한 말씀입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23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누구이고, 그때는 언제일까요? 그들은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포함한 모든사람이고, 그때는 바로 지금인 것이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말은, 성령을 믿고 따르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신앙을 그저 뜨겁게 만드는 무엇이 아닙니다. 성령은 유대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게 하는 하나님의 숨입니다. 성령으로 인해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게 되었거든요.

 

영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다는 예배의 보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도, 사마리아 민족도, 우리 한민족도, 흑인도, 백인도 말입니다.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사람에게만 진리인 것이 아닌 사마리아 여인 당신에게도, 우리 같은 이방 사람에게도 진리인 것을 예배하라는 겁니다. 그 진리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 당신도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런 예배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요.

 

5. 모압 여인 룻을 통해, 우리는 이방 여성 한 사람의 믿음으로 인해, 그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죄의식 가운데 가두어 놓았던 율법이 우리의 믿음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서는 당신도 함께 참여하는 예배야말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 사람도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믿음이 확장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장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예배에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민족을 통해 그 확장이 이루어집니다. 이방 민족 중에서 가장 천하다고 여김을 받은 여성을 통해 그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고,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도 오늘 이 시간 예배하고 있습니다.

 

6월입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지쳐갈 때가 되었습니다. 인생사, 1년 중 6월이면 조금 긴장감도 풀어지고 그렇게 됩니다. 은진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만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매주 이렇게 정성스럽게 예배드리는 이유를 기억하십시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을 확인하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어 나의 삶을 이끌어 주는 지침이 되시며, 성령께서 힘들 때마다 우리와 동행하심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 나가, 누구와도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방 여성 룻이 우리 신앙의 조상이 됩니다. 그들이 따랐던 율법이 우리에겐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여정은 과거의 사건과 연대하고, 현재를 의미있게 살며,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룻과 갈라디아 교인과 사마리아 사람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품었던 것은 미래에 대한 소망임을 기억하며, 우리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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