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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상을 대하는 사람들 /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 맥추감사주일 장본 목사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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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상을 대하는 사람들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맥추감사주일

20240707

 

이사야 64:5-9

5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6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7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8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9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에베소서 1:10-14

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12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14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13:28-37

28 “무화과나무에서 비유를 배워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안다.

29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온 줄을 알아라.

30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31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33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사정은 여행하는 어떤 사람의 경우와 같은데, 그가 집을 떠날 때에, 자기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35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녘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무렵일지, 이른 아침녘일지, 너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와서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이에요. 그래서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에게 맥추감사주일에 대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맥추감사주일에서 은 보리를 뜻해요. ‘는 추수하다 할 때 그 추 자입니다. 말 그대로 풀면 보리의 추수를 감사하는 주일 혹은 절기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매년 7월 첫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킨답니다.

 

맥추감사주일은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오던 절기에서 시작을 찾을 수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켜온 절기 중 칠칠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그 절기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맥추감사주일이랍니다.

 

칠칠절은 무교절 이후에 칠 일을 일곱 번 세서 지키라는 의미로 칠칠절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총 49일이 되겠지요. 그 무렵이 당시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기간과 겹치면서 추수를 감사하는 감사절로 바뀌게 되었답니다.

 

중요한 것은 맥추감사주일의 정신이겠지요? 그것은 구약 신명기에 나오는 칠칠절의 정신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신명기 1611절에 보면, 칠칠절에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와 모든 종과 같이 사는 이방 민족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날이라고 전하고 있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날이 바로 맥추절인 거죠. 오늘날로 치자면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도 같이 행복해야 하는 날인 겁니다. 중요한 것, 나만 행복한 것 아니고, 우리 가족만 행복한 것 아니고, 우리 교회만 행복한 날이 아닌 거예요. 모두가 행복해야 하는 절기, 모두가 감사해야 하는 절기가 바로 맥추감사절인 거죠.

 

우리 자랑스러운 은진의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오늘 예배를 통해 교회 밖에서 친구들과 가족들과 감사함을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느 주일과 조금 다를 듯싶습니다. 세 본문 설교인 것은 맞습니다. 중간중간 제가 지난 주중 겪었던 일과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말씀 중에 같이 전하려고 합니다. 설교는 함께 예배하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 드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더불어 제 친구인 이시영 목사를 위해서도 이 설교를 전하려고 합니다. 그분이 누구인지는 곧 알게 될 겁니다.

 

지난주 월요일 밤에, 서울 시청역 앞 도로에서 역주행하는 자동차가 인도로 돌진하는 사고로 9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한 주 전에는 경기도 어느 배터리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2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가 있었지요. 사망자의 대부분이 산재보험조차 가입되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사연을 뉴스로 보니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또 타국에 와서 비명횡사한 외국인들을 보면 이 나라가 2024년의 나라가 맞는지 의아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을 빌려, 사망한 모든 분과 그 유족 위에 주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두 사건 모두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래요... 그래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내야지. 그런데 지난 화요일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시영 목사는 저와 신학과 동기 목사입니다. 제가 뒤늦게 신학을 하는 바람에 제 동기들보다 9살이 많은데, 이 친구는 나이마저도 저와 동갑입니다. 29살 나이에 신학과 1학년으로 입학한 동갑내기 동기 목사가 이시영 목사입니다.

 

그 목사님은 다른 신학과 동기와 결혼하여 일찌감치 제주에 내려가 귤 농사를 지으며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니, 풀타임 사역은 하지 못하다가 단독목회를 시작한 지 지금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제주에 내려갈 때면 자주 만났고, 같이 밥 먹고 대화하고, 연락은 자주 못 했지만, 저에게는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였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농사일하다가 파쇄기에 오른팔 팔목이 잘려나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제주에 있는 다른 목사들에게 급히 연락을 해 보니, 사고가 난 지 24시간이 넘었는데도 의료파업으로 인해 수술실을 잡지 못하고 화요일 오후까지도 수술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9명이 죽은 교통사고 소식에도, 20여 명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가 죽은 그 화재에도 마음 드잡이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런데 친구 소식에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성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필 화요일에 교회 정리를 하면서 오른손등에 2센티 될까 한 생채기가 났습니다. 별거 아닌데 쓰리더군요. 몇 시간 동안 신경 쓰였습니다. 그 생채기만 온종일 들여다봅니다.

 

저에게 화요일은 설교 초안을 쓰는 날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외부 일정을 잡지 않습니다. 초안이 써지지 않으면 집에도 가지 않고 밥도 안 먹는 날이 많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제 오른손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뒤로 하고, 이번 주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오늘의 세 본문 말씀입니다.

 

1. 오늘 구약의 말씀은 이사야의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사야 56장부터는 망한 이스라엘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이스라엘이 망하고, 뿔뿔이 포로가 되어 흩어진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세대에게 주시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전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악을 모두 과거형으로 표현합니다. 확인합니다. 이사야 645절입니다.

 

5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5절은 주님이 어떤 사람을 만나주시는 분인지 가르쳐줍니다.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주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그 주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은 오랫동안의 죄 때문에 진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분명 죄를 지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이제 포로에서 풀려났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6절과 7절은 오랫동안 지은 이스라엘의 죄를 담담하게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과 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길이 담겨 있습니다. 확인합니다. 먼저 8절입니다.

 

8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첫 번째 길, 우리가 주님의 피조물, 주님의 창조물임을 다시 인식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다 내가 한 것 같거든요. 내가 부지런하고,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내가 긴장에 긴장을 더해 살아가면서 이뤄낸 것 같습니다.

 

내가 했기에 가끔 타인을 정죄했으면서도, 환경을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사회에 무감각했어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만큼 더 열심히 일했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는 순간 내가 주님의 창조물임을 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참 잘 나 보입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기억한다는 말은 내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주장하시고, 나를 이끌어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기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구원에 이르는 두 번째 길입니다. 9절입니다.

 

9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내가 주님의 창조물임을 기억하는 인생은 기도하는 인생이 됩니다.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요. 우리의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달라고요. 우리가 주님의 백성이라고 기도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 기도 안에 우리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겸손이 담기게 됩니다. 내 지식으로, 내 생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은진 교우 여러분. 세상이 참 불공평한 듯합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 시민이었다면, 최소한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을 들었을 겁니다. 법이니까요.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던 외국인 노동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회사에서 승진해서 뒤풀이하고 집에 가는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제 친구는 그렇게 사고를 당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얼토당토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할 말 없으니 장 목사 기도하라 한다고요? 아니요. 그 할 수밖에 없는 기도에 우리 삶의 깊은 성찰을 담아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성찰이 주님이 나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기도밖에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로 우리의 삶을, 이 세상에 대한 우리 삶의 성찰을 담아낼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지난 114일 서신서 설교 때 저는 이런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렸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읽을 땐 꼭 이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읽어야 한다고요. 유대인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그리스 등 이방인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공존한다고요. 이것만 떠올리면 바울서신은, 절반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 에베소서 110절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옵니다. 확인합니다. 10절입니다.

 

10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어느 때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 되게 하는 겁니다. 통일시키는 것, 하나 되게 하는 것,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똑같은 유니폼입고 똑같은 장소에 모여 신천지 유다지파 17차 집회에 모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헤아리는 거죠. 당신과 내가 환대하는 세상입니다.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도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존중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라는 말씀입니다.

 

11절부터 14까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읽어야 합니다. 앞 두 절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말씀으로 읽어야 하고, 13, 14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먼저 1112절입니다.

 

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의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계획에 따라 미리 정해진 일입니다.

12 그것은 그리스도께 맨 먼저 소망을 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우리는 상속자입니다. 과거형이지요. 그래서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부터 이끌어주신 그 이스라엘 백성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나라를 만들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만난 사람들, 즉 에베소 공동체를 이룬 사람 중 유대인에 속한 사람들에게 맨 먼저 소망을 둔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전합니다. 그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요. 그러면 13, 14절에서는 어떤 말씀을 주실까요?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14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여러분도라고 시작합니다. 앞에서 말한 우리와는 다른 사람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여러분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민족 사람으로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성령님의 확인 도장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성령강림절기에 수도 없이 드린 말씀이 있어요. 성령은 이방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이라고요. 그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우리도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아주 강조해서 말씀드렸지요.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14절 우리도 하나님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방 사람들도 상속자가 될 수 있었다고요. 이제 우리의 존재 이유도 같아지겠네요.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사람들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다는 말의 본뜻입니다. 이미 하나 된 우리이니 다른 이단에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 이슈에 잠시 휘청거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를 이 땅에 가꿔가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복음서의 말씀은 우리 교회 화단에 있는 무화과나무로 풀어드릴게요. 교회 주차장 양쪽 화단에 몇 그루의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나가시면서 왼쪽에 있는 큰 무화과나무를 보세요. 초록 열매가 한 30개쯤 열려있습니다.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그 무화과나무, 딱 두 달 전만 해도 잎사귀 하나 없는 줄기만 있던 나무였습니다. 그렇게 겨울을 버텨냈습니다. 그 가지에 잎이 나니까, 신기하게도 봄바람이 불더군요. 아무것도 없던 가지에 잎이 나고 무심하게 한두 달이 지나니 저리 열매가 맺혀 있더군요. 그랬더니 7월 초인 거에요.

 

이제 그 열매는 커지고 붉은 빛도 띠고, 갈색 빛도 띠며 익어갈 것입니다. 먹을 수 있을 땐 이제 한여름이 될 것입니다. 열매가 많아 어느 주일 점심 식사 시간에 같이 먹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교회에서 무화과 열매를 먹게 될 때 즈음 분명, 이 말씀을 또 기억하실 겁니다. ‘언제 다 익었대?’라면서요.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옵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33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그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32절은 다 기억하시겠지요? 그 날과 그 때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은 3주째 복음서에서 우리가 말씀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 기억하실 겁니다. 이제 기억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33절인 것이죠. “깨어 있어라.” 하십니다. 마지막 37절입니다.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깨어 있으라고요. 그런데 듣는 대상이 확장되었네요.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고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거든요. 이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고요.

 

깨어 있으라는 말이 해석이 필요할까요? 헬라어 원어를 가지고 이 단어는 본래 잠자지 않는다하는 뜻이므로, ‘여러분은 언제나 깨어 있고 긴장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라고 풀어드려야 할까요? 아니요. 풀지 않고 우리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도움이 됩니다. 그저, 깨어 있으면 됩니다.

 

4. 세상에는 참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배우자의 죽음, 자녀의 죽음, 친구의 죽음이나 불의의 부상. 온갖 천재지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차라리 낫겠습니다. 저보다 먼저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모습이라면, 적어도 세상의 이치에 맞으니까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말 그대로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주일.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밀을 추수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그 절기를 오늘날까지 이어받아 우리가 지켜내는 주일입니다. 그러니 무언가 하나님께 감사할 제목이 있어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참 무거움을 던져주는 한 주였네요. 우리는 오늘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농사짓는데, 매해 풍년일 수는 없겠지요. 요즘 같은 기후 이변이면 추수할 것이 적을 수도 있겠네요. 삶이 매일 행복할 순 없잖아요. 웃다가도 우는 일이 생기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 감사합니다. 무엇을요?

 

나에게 무언가 주심을 감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건 가르치지 않아도 세 살배기 아이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신앙인의 감사는 일상에 대한 감사가 아닐까요? ‘일상에 대한 감사란 삶에 대해, 보다 성숙한 모습으로 대하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감사할 수 없지요. 사고를 감사할 수 없어요. 그런데 결국 죽음과 사고를 포함하여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모습을 신앙인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감사의 전부가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기억하는 것,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것, 그리고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참 약한 존재여서 죽음 앞에, 사고 앞에 무기력합니다. 저조차도 지난주 내내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선포되어야 할 말씀은 그래도 우리는 신앙인이라는 것,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기억하는 것, 그래도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흘리는 눈물, 그래서 드릴 수밖에 없는 기도 가운데, 그것이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슬픔 가운데 임하는 위로와 눈물 가운데 임하는 감사를 경험하는 우리 은진 공동체의 모든 성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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