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방향성 / 사순절 다섯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04-0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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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사랑의 방향성 사순절 다섯째주일 20250406 신명기 6:1-9 1 이것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가르치라고 나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입니다. 당신들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이것을 지키십시오. 2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며, 내가 당신들에게 명한 모든 주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당신들과 당신들 자손이 오래오래 잘 살 것입니다. 3 그러니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이 모든 말을 듣고 성심껏 지키면,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당신들이 잘 되고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4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5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6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8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9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 요한1서 3:11-18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는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14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18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복음 13:31-35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32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 33 어린 자녀들아, 아직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유대 사람들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나는 너희에게도 말하여 둔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은 세 본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한 단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그 단어는 바로 ‘사랑’입니다. 구약-서신서-복음서 모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로 풀기 참 어렵습니다. 왜냐면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거든요. 여러분 부모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사랑하라고 배웁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사랑하래요. 여러분이 좀 더 커서 누군가를 사귄다고 말할 때,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거에요. 사실은 여러분 부모님도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했고, 여러분을 낳았거든요. 벌써 네 가지의 사랑을 말했어요. 그런데 듣기만 해도 다 똑같은 사랑이 아닌 것 같죠? 사랑이라는 단어는 같지만, 누구를 사랑하는지에 따라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봤어요. 국어사전에서도 무려 네 가지로 설명을 하고 있더라고요. 한 번 들어보세요. 1)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2)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3)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4)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아까 목사님이 말한 네 가지 사랑이 모두 설명에 담겨 있네요. 이제 알 수 있겠어요. 사랑이라는 단어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마음’이구나 하는걸요. 마음이라고요. 좋아하는 마음, 소중히 여기는 마음,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마음이니까, 눈에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 마음을 담아 행동을 해야 상대방이 알 수 있는 거예요.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짝사랑’이라고 하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데 표현하지 못하면 내 마음과는 달리 ‘무관심’이라고 불리게 된답니다. 사랑은 무엇무엇을 하는 마음이에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부모님을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세요. 친구를 사랑한다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꼭 표현하세요.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도 사랑해 주셔야 해요. 왜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적으로 따라야 할 단 한 분이시거든요. 그렇게 하나님과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멋진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사랑이 무엇무엇을 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자식을 아끼는 마음, 배우자를 존경하는 마음, 부모를 안쓰러워하는 마음, 제자를 바라보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다 사랑이라고요. 그래서 사랑은 다양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요. 더 명확하게 말이죠. 그래서 마음이라는 단어도 무슨 뜻인지 찾아봅니다. 마음은 생각, 인지, 기억, 감정, 의지, 그리고 상상력의 복합체로 드러나는 지능과 의식의 단면을 가리킨다고 풀고 있네요.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해졌습니다. 사랑은 어떤 형체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사랑은 이런 것이야 라고 보여줄 어떠한 모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냐면 사랑이라는 것이 이성에게, 부모에게, 자식에게, 누군가에게 내 생각, 기억, 감정, 의지 등 상상력의 복합체로 나타내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죠. ‘사랑은 추상적이야’라고 말이죠. 알 듯하면서도 참 어려운 것이 사랑이거든요. 무엇 하나로 사랑을 정의하기에는 무리가 있거든요. 오늘 세 본문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주일. 사순절로는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성경에 거의 매주 나왔던 한 단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단어가 바뀝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이제 세 본문이 말하는 사랑으로 사랑여행을 떠납니다. 2. 구약 신명기에 나오는 사랑이야기입니다. 5절입니다. 5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신명기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 주님 사랑’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왜일까요? 4절입니다. 4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분뿐이신 주님 말입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이 떠오르지 않나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제1계명은 다른 아홉 개의 계명보다 가장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었던 자신들을 해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앞이 바다로 막혔다고, 배고프다고, 목마르다고 시도 때도 없이 징징거렸던 백성들을 이끌어 주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이 당연합니다. 살게 해 주셨으면, 살길을 인도해 주셨으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요.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는 배신이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배신’이라는 유명한 드라마도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배신이 되는 거예요. 반역이 되는 거고, 거짓말하는 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제가 기도를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문구를 기억하실까요?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고요. 방향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분이라고요.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이렇게 존재하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삶의 매 순간순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고백에 맞게 살아가는 신앙인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오늘은 복음서의 사랑을 먼저 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입니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보고 오니, 신기하게도 사랑의 방향성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다르지요. 하나님께서 나를 존재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렇게 전해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구약의 말씀대로라면,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해야 맞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는, 너희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구약의 사랑과 다르죠. 달라도 완전히 다른 사랑이죠. 그래서 34절 첫 문장에 이렇게 쓴 겁니다. 함께 읽습니다. 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새 계명이라고요. 같은 사랑인데, 구약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이라고요. 구약, 오랜 약속이잖아요. 신약, 새로운 약속이잖아요. 그러니 사랑도 다르다고요. 새 계명이란 말입니다. 그럼 구약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은 뭐가 다른데요?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배웠지요. 그래서 문신도 새기고, 띠에도 묶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한다며 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야!’라고 외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자기들끼리만 사랑했습니다. 한 인간 존재의 고귀함 때문에,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계명은 같은 유대인 종족에게만 해당했고 그래서 이방인의 아내는 예외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그들에게 이웃은 철저히 유대인 종족 중심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들이 용서할 이웃도, 사랑할 이웃도, 탐하지 말아야 할 이웃의 소유도 그 범주는 자기들끼리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이리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요. 긴 시간의 편협함을 넘어서는 ‘사랑’을 예수님께서 전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새 계명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6월에 평택 새벽의 집 분들을 초대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다른 곳에 선교지원을 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다음주 산불로 피해를 받는 분들을 위해 헌금을 준비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새 계명 덕분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 덕분에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놀랍지 않나요? 사랑은 내가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 덕분이라니요. 그리스도인으로 할 수 있는 사랑은 예수님의 새 계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의 사랑이라는 것은 내 의지가 아닌,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르는 우리의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질문해야지요. 나는 새 계명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 내가 새 계명으로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그동안 우리 사랑의 범위는 어디까지였는가 말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끼리만 하는 배타적인 사랑인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사랑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적어도 3~4년 이상 만난 사람만, 혹은 교회 다니는 사람만, 우리 가족만, 내 자식만, 우리 민족만 등등등...... 우리 사랑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요?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이 지금껏 생각해 온 그들에게 허용되고, 인정되는 범위 내에서만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 예수님은 그것을 넘어서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라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말입니다. 서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로 사랑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마지막 서신서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완결편입니다. 요한1서 3장 11절입니다.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복음서와 같네요.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으로 세워진 공동체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희석되어 갔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니, 역시 끼리끼리 문화가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생겨납니다. 14절 마지막 문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부터 15절입니다. 14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극단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음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요. 사랑하지 않는 건,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것.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하는 사람이라고요.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전하는 요한의 마음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을까요? 16절입니다. 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순절이지요. 이제 종려주일을 거쳐 고난주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십니다. 매해 이 절기를 지나면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올해부터는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리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이 죽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목숨 바친 그 사랑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18절입니다. 18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의 완결편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말로만 사랑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면 그에 걸맞는 행동, 진실한 행동을 함으로 사랑을 드러내십시오. 5. 사랑. 아름답습니다. 때론 상처가 되기도 하죠. 헷갈리기도 합니다. 뿌듯하기도 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일 때도 있습니다. 사랑해서 죽고 못 살겠다고, 결혼한 사람들도 때때로 헤어집니다. 사랑은 한 번 했다고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10년 전에 사랑했던 사람을 지금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에 많이 사랑했으니 되었다고 이제 완성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지속적인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한 번 맺으면 완성되는 결과라기보다는 끊임없이 가꾸어가는 과정, 마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내면에 심겨진 사랑 나무를 잘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게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내 옆에 있는 당신을 사랑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무겁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목숨값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 옆의 사람을 사랑하면서,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완결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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