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호와 외면 / 종려주일 | 장 본 목사 | 2025-04-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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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환호와 외면 종려주일 씨뿌림주일 4·19혁명기념주일 20250413 스가랴 9:9-12 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0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 11 너에게는 특별히, 너와 나 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이 있으니, 사로잡힌 네 백성을 내가 물 없는 구덩이에서 건져 낼 것이다. 12 사로잡혔어도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아, 이제 요새로 돌아오너라. 오늘도 또 말한다. 내가 네게 두 배로 갚아 주겠다. 빌립보서 2:1-11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12-19 12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14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보시고, 그 위에 올라타셨다. 그것은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과 같았다. 15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네 임금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16 제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으나,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 뒤에야, 이것이 예수를 두고 기록한 것이며, 또 사람들도 그에게 그렇게 대하였다는 것을 회상하였다. 17 또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 일어난 일을 증언하였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운동회 해 봤지요? 오늘은 운동회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해요. 운동회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제일 마지막 종목인 이어달리기죠. 보통 청팀과 백팀으로 나누어서 달립니다. 여러분은 백팀입니다. 이어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는데, 아뿔싸! 백팀 한 선수가 넘어집니다. 백팀 응원석에서는 탄식이 쏟아집니다. 청팀은 신났습니다. 거의 반 바퀴를 앞섰거든요. 이미 승부는 끝난 듯싶습니다. 남은 주자도 몇 명 없습니다. 그런데 백팀 응원석 한 모퉁이에서 응원이 터져나옵니다. ‘백팀 힘내라! 백팀 이겨라!’ 누가봐도 청팀이 이길 것 같은데 백팀의 응원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 소리를 주자들이 들었을까요? 열심히 열심히 달려서 마지막 주자에게 바통을 넘겼을 땐 청팀에 5m 정도까지 따라잡습니다. 응원 소리는 더 커져만 갑니다. 마지막 백팀 선수는 정말 미친 듯이 달려서 마지막 결승점을 앞두고 청팀 선수를 앞질러 골인합니다. 응원석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백팀이 이겼습니다. 이런 짜릿한 경험 아마 해 보셨을 겁니다. 자! 백팀이 이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백팀이 이긴 건, 달리는 주자들이 청팀 주자보다 빨라서 이긴 거죠. 그런데 응원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응원해서 이긴 거야!’ 맞습니다. 달린 건 선수이지만, 응원하는 사람들의 그 응원 소리를 뛰는 주자들은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었을 겁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응원을 받으면, 지지를 받으면 더 신이 나서 자기의 능력 이상을 발휘할 수 있게 되거든요. 백팀이 이긴 이유는 빨리 달린 선수들과 포기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응원한 모든 사람의 외침이 합해져 이길 수 있었건 겁니다. 만약 중간에 넘어졌다고, ‘에이! 틀렸어! 졌어!’라며 주저 앉았더라면, 백팀은 분명 졌을 겁니다. 오늘 복음서에 예수님을 응원하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응원을 받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그날이 바로 오늘 종려주일입니다. 하지만 그 응원은 바로 차갑게 식었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괴롭히기 시작했거든요. 나도 괴롭힘을 당할까 무서워 예수님이 당하는 어려움을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했던 환호성과 응원은 외면으로 바뀝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내가 백팀이라면 지고 있더라도 결승선에 골인할 때까지 응원해야 합니다. 그럼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 내가 좋아하고 환호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면 적어도 그분을 끝까지 응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신앙인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은진교회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인으로 커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이미 승부는 기울었습니다. 야구경기로 치자면 9회말 투아웃 주자도 없고, 점수는 대략 9:0으로 지고 있고, 게다가 타자도 별 볼 일 없습니다. 상대 투수는 최고의 마무리 투수입니다. 관중은 하나둘 경기장을 빠져나갑니다. 승부가 이미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도 이미 승부가 기운 듯 보입니다. 요한복음 12장 19절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 이제 다 글렀어. 세상 사람들이 온통 그를 따르고 있잖아!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 2천여 년 전 오늘, 바로 종려주일입니다.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함께 외쳐봅니다. 13절입니다. 1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많은 이의 환영 세레머니, 이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이미 승부는 예수에게로 기울었어!”라고요. 더 설명할 것 없이 예수님은 그리 오셨습니다. 비싼 외제차가 아닌 어린나귀타고 오셨지요. 그런 예수님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차를 타고 온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반겼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호산나” “주여 비옵나니 구원하여 주옵소서.”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여러분 삶의 구원을 바라고 계십니까? 기독교에서 오늘만큼 의미있는 절기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부활이 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곧 ‘고난’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부터 고난주간을 지내게 되지요. 언젠가부터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부활’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매일매일 부활의 삶을 산다면 그것만큼 신앙적이고, 기독교적인 생활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허투루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자꾸 부활만 강조하다 보니 부활 전 일주일, 바로 고난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지더라는 거죠. 솔직하게는 고난을 ‘외면’하며 산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외면. 제가 여기 계신 한 분에게 돈을 빌렸다고 합시다. 오늘까지 갚는다고 했는데 갚을 생각이 없어요. 저기 그분이 와요. 저도 봤고, 그분도 저를 봤어요. 그런데 제가 휙 고개를 돌려서 모른 척하고 그냥 가버려요. 이게 외면입니다. 외면. 대면하기를 꺼리는 것, 일부러 피하는 겁니다. 고난을 외면한다는 말, 일부러 회피한다는 뜻이죠. 어떻게 대충 피하고 버티다, 한 주만 지나면 부활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고난을 피할까요? 말 그대로, 어려운 일을 얼굴 맞대기 싫어서입니다. 인간의 본능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몰라서 피하는 것 아니라, 알면서 피한다는 데 있지요.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 회피합니다. ‘도망’가는 겁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서요. 어떤 유익이요? 나 편하려구요. 이런 말 많이 쓰잖아요. 귀차니즘.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정체불명의 단어지요. 귀차니즘은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닙니다. 아니까 안 하는 거죠. 불편한 걸 아니까, 힘든 걸 아니까, 시간 뺏길 걸 아니까. 그래서 안 하는 거죠. 피하는 것이지요. 그게 참 나빠요. 운동선수로 치면 고의적인 파울과 같습니다. 같은 반칙이어도 고의적인 반칙은 그 대가가 훨씬 무겁지요. 고난을 외면한다는 말. 고난의 그 길이, 가치 있는 길인 줄 알면서도 피해간다는 겁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까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첫째 두려움, 둘째 공포, 셋째 불안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 공포, 불안! 그 내용은 다양할 수 있겠지요. 건강에 대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련된 것일 수 있고요, 생존과 관련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정도 이유로 고난을 외면하는 분이라면 솔직히 괜찮습니다. 개선의 여지가 충분하거든요. 더 큰 문제는 두려움과 공포, 불안, 귀차니즘을 빙자한, 사실은 다른 ‘핑계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교회를 나가면 돈을 못 벌어. 내 자식이 교회를 나가면 공부를 못해. 내가 예배를 드리면 여행을 못 가. 이런 핑계들로 고난, 혹은 불편함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사람들, 서서히 신앙이 병들어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빨리 회복하지 않으면 만성질환으로 변해 버립니다.
2. 요한복음 12장 12절입니다. 12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한 절 더 봅니다. 18절입니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가 이런 표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두 절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단어가 바로 “무리”입니다. 어떤 무리입니까? 먼저 12절의 무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리를 듣고 부푼 가슴을 안고 기다렸던 사람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친 사람들입니다. 읽진 않았지만 17절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라고 번역한 단어도 무리예요. 그 무리는 예루살렘 입성 전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그때, 무덤 주위에서 그 기적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18절에 나오는 무리는 12절의 무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결국, 세 무리 모두 예수님을 따르거나, 따를 예정이었던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무리가 또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외면한 무리입니다. 호산나라고 ‘오늘’ 외치고 있지만, 그들이 바로 ‘내일’ 예수님을 못 박게 만들었습니다. 못 박은 것은 로마의 군인들이 아닙니까? 아니요. 그 무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외면하지만 않았더라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셨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며, 온 성에 소동이 날 정도로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하던 무리들! 그 무리가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내일부터 일주일 내내 말이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 할수록 무리는 예수님을 더 따라야만 했습니다. 더 지켜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정화하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하면서 힘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을 때, 그리고 잡혔을 때, 고난받고 돌아가실 그때까지...... 무리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그 무리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축하하던 무리였습니다. 아까 승부가 예수님에게로 기울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말이 예루살렘 입성을 보며 내뱉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한탄이었잖아요. 그렇게 승부가 기울었건만, 9회말 투아웃 9대0으로 이기고 있었건만, 그 경기를 역전당해 버렸습니다. 사실 현실 야구에서도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말이지요. 그 무리가 예수님 곁에만 있었더라면,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더라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한탄이 현실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나 경기는 어이없게 역전패하고 말았습니다. 고난을 외면했던 바로 그 ‘무리’ 때문에 말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제가 지금 고난주일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잖아요. 부활의 길로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나요? 바로 우리가 그 무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기운 승부마저도 역전패하게 만든 예수님의 고난을 외면했던 그 무리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제 알았으니까, 이제 정말 알았으니까, 고난주간만이라도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가 예수님의 고난 옆에서, 아니 내가 그 고난을 같이 감당하자고 당부하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간곡히, 정말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들, 그 주님을 따르는 일들, 절대로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외면은 피하는 겁니다. 그래서 비겁한 겁니다. 차라리 당당하게 앞에서 말하세요. 그게 정직한 겁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살아가는 삶 가운데 절대로 예수님을, 그분의 가르침을 외면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장 1절입니다.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씀합니다. ‘관계’를 말씀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이라는 뜻이죠.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무슨 격려나, 서로 지지하는 ‘관계’를 말하는 거죠. 두 번째 사랑의 무슨 위로나, 말 그대로 사랑으로 서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를 뜻하죠. 세 번째 성령의 무슨 교제나, 서로 친교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마지막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서로 돌보아 주는 마음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겠네요. 이렇게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너희 공동체, 우리 은진교회에 있거든! 이 말씀이신 거죠.
네 가지 전부도 아니고요. 네 개 중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겁니다. 누군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아!’라고 격려해 줄 마음이 있는 사람이거든, 정말 지치고 힘들어하는 이에게 위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거든,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거든,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이거든. 이어서 2절입니다.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공동체라는 곳은 이래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품고 사는 공동체라면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같은 목표를 가짐으로 인해서,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한 조건을 1절에 네 가지로 정리해 두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 교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마음을 같이 하는 공동체이어야 하며,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는 공동체이어야 하고, 그래서 한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교회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삶으로 고백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리면서 내가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교회이고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5절에 나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갑니다. 지상에서 천국이 있다면 아마 분명히 그런 곳일 겁니다. 모름지기 교회라는 공동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못다 이루신 일을 위해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애쓰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런 교회에서 분열이 나고, 갈등이 생기고,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마음이 될까요? 그렇게 아니 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이며,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바로 한마음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기에 바울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으라 하는 것일까요? 6절부터 8절입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말씀 대로입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겠노라고 기도할 때마다 고백하는 예수님의 본모습. 그렇게 사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셔서 그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섬김>이라는 찬양을 우리는 매주 부르고 있습니다. 그 가사 내용이 또 나왔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시니 비록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꼭 기억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4. 구약 스가랴의 말씀에는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의 모습, 구원자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평화를 선포하는 분이시고, 사람들을 건져 내시는 분으로 오십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오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구원자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오심을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삶으로 느끼는 오늘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일부터 주님은 고난의 길을 걸으십니다. 우리 그 길을 외면하지 마십시다. 예수를 대적했던 사람들의 권세에 주눅 들지 마십시다. 예수가 구원자로 오셨으니, 우리도 당당하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십시다. 그리고 부활의 대열에 함께 하십시다. 한 주간 우리의 삶을 경건하게, 예수라는 거울에 비추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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