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 / 부활절 둘째주일 | 장본 목사 | 2025-04-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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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부활,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 부활절 둘째주일 20250427 에스겔 11:14-20 14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5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이 네 모든 친척, 네 혈육,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 땅은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16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 17 그러므로 너는 포로가 된 동포들에게 이르기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너희를 모아 들이고, 너희가 흩어져 살고 있는 그 여러 나라에서 너희를 모아,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여라. 18 그들이 그 곳으로 가서, 그 땅의 보기 싫고 역겨운 우상들을 그 땅에서 다 없애 버릴 것이다. 19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일치된 마음을 주고, 새로운 영을 그들 속에 넣어 주겠다. 내가 그들의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겠다. 20 그래서 그들은 나의 율례대로 생활하고, 나의 규례를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로마서 6:3-14 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4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5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6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7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9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10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3:1-15 1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하였다.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 7 너희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을, 너는 이상히 여기지 말아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9 니고데모가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1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 1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우리가 본 것을 증언하는데,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난주 동화 이야기 기억나나요? 돌아가신 아빠 액자를 텃밭에 심었던 은진이 이야기 말이에요. 봄이 땅에 힘을 준다는 말에, 그래서 감자가 많이 열린다는 엄마의 말에 은진이는 아빠 액자를 밭에 심지요. 은진이는 어렸지만, 엄마를 통해 부활의 의미를 잘 이해했을 거라고 목사님이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부활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건, 나이가 어리더라도 나름대로 부활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어른은 어른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부활을 이해한다는 말은 부활에 대해 다양하게 풀 수 있다는 말이랍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부활을 다르게 한 번 여러분에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이런 말 해봤을 거예요. ‘같이 하자! 같이 놀아! 같이 가는 거야!’ 이 말이 뭐예요? 너랑 나랑 ‘함께’라는 뜻이잖아요. ‘같이’라는 단어의 뜻은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거예요. 오늘 서신서 말씀 중 한 절을 함께 읽어 봅니다. 로마서 6장 8절이에요.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함께’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함께 죽었고요, 두 번째는 함께 살아날 것이라고 해요. 누구와 ‘함께’냐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래요. 우리는 목사님,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여기 있는 모든 교우를 뜻해요. 그리스도는 예수님이예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면, 우리가 함께 살아날 거래요. 왜 그럴까요? 지난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죽으셨고요, 그리고 부활하셨어요. 우리도 부활할 수 있을 거래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이 죽으면 되는 거예요. ‘목사님. 그럼 우리 죽어요?’ 잘 들어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말의 의미는 이런 거예요. 나의 생활이, 내 생각이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 변화한다는 의미예요. 변화가 핵심이에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변화하면, 그게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함께 살아난 거예요. 이게 살아있는 사람이 부활할 수 있는 비밀이랍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살아있는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 길이 있어요. 우리가 예배드리고, 신앙인으로 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변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우리의 부활이랍니다. 그렇게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의 심화 과정입니다. ‘함께’라는 단어 말씀드렸지요. 이 단어 참 재미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 혼자서 많은 것을 아니,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하는 세상인데 자꾸 함께 뭔가를 하자고 부추깁니다. 더불어 살자고 말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린이-청소년 시기에 학교에서 중요하게 배우는 개념이 바로 ‘함께’입니다. 왜 어린이-청소년 시기에 이 개념을 배우냐면, 이때 ‘함께’라는 개념을 배우지 않으면, 성인이 되어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 맞지만, 함께 살지 않으면, 더불어 살지 않으면 그 사람,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함께’라는 단어를 배우면 나 아닌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을 배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함께라는 개념이 너무 강해지면 문제가 생겨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한 사람의 개별성을 무시하게 되죠. 가족이라는 개념을 너무 강조하면, 가족을 구성하는 한 사람의 희생을 너무 강요할 수도 있지요. 사회-국가적인 관점에서 함께라는 개념이 강하게 되면 더 큰 일이 납니다. 독일 나치가 그랬고, 일본 군국주의가 그랬어요. 전체주의라고도 하지요. 개인의 의지, 생각, 노력 이 모든 것을 사회와 국가가 통제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은진교회를 이뤄가지만, 함께라는 개념을 너무 강조하면 교회 안에서 개별적인 생각을 하는 교우들의 의견이 무시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한 사실은 개인적인 차원이든, 사회-국가적인 차원이든, 교회든 한 사람의 개별성과 함께라는 개념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는 ‘더불어’여야 합니다. ‘우리’도 중요하고, ‘나, 너’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적절한 ‘함께’의 개념을 반드시 지녀야만 합니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6장 3절입니다. 3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함께 죽었다”고 전합니다. 언제요? 여러분이 세례받았을 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처럼, 우리도 죽었다고요. 세례가 그런 의미라고요. 이전의 삶이 아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요. 보통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한다고 표현해요.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던 것”이라고요. 그럼 세례는 왜 받는 건데요? 4절 마지막 부분 보세요. “우리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실제 예수님의 죽음과는 다르나, 의미로는 같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제 말이 아니에요. 5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읽었던 8절, 다시 한번 읽습니다. 8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자, 옆에 분과 이렇게 권면합니다. ‘함께 살아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부활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1절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절 더 봅니다. 13절 중간, “오히려”부터 읽습니다. 13 ......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사는 법, 줄여서 부활한 우리가 부활한 사람답게 사는 법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여러분을 바치십시오. 부활했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삶, 14절입니다. 14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여러분.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기가 은혜입니다. 오늘이 은혜입니다. 오늘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삶, 이것이 부활의 삶임을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없이 평화는 없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없이 평화는 없습니다.” 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날 부활절에 남긴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는 다르지만, 우리는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부활절 메시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그의 메시지에 오늘 우리가 읽는 본문과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개인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라고 말한다면 한 사람이 선택하여 믿는 종교, 한 사람이 내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을 우리는 되도록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함께’라는 개념과 조금은 동떨어져 보이기도 합니다. 어려워 보이는데, 사실은 우리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 다니는데, 옆집 이웃은 성당을 다녀요. 단골 식당 사장님은 불교를 믿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 이웃에게, 식당 주인에게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그분들도 나에게 왜 예수 믿느냐고 뭐라고 하지 않잖아요. 직장에서의 회의, 취미를 위한 모임, 독서를 위한 모임을 해 보면 토론합니다. 독서모임이라고 치면 그 책에 대해, 나오는 주인공에 대해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합니다. 나랑 다른 의견이라고 해서 죽이려 들지 않아요. 왜냐면 그 사람의 표현이 나와 다르나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의견을 말한다면서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을 악마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그 신앙을 정치에 투영하여 나와 지지 성향이 다른 무리를 악마화합니다. 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존중은 없습니다. 우리 지난 12월부터 광장을 통해 확인해 왔잖아요. 직장에서의 회의, 모임에서의 대화, 교회 안에서의 여러 모임.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건 자유이지요.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꼭 상처받는 이들이 생겨납니다. 나는 자유롭게 말하는데, 듣는 이는 불편한 겁니다. 나의 자유가 상대방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건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겁니다. 나만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두 가지를 말씀드렸어요. 우리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일, 사회적으로 벌어지는 일. 똑같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으니 평화가 오지 않는 겁니다. 다시 한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마지막 부활절 메시지를 전해드립니다.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없이 평화는 없습니다.” 아까 읽었던 말씀입니다. 부활한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 서신서 11절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절 더 봅니다. 13절 중간, “오히려”부터 읽습니다. 13 ......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오늘 구약과 복음서는 주일성서학당 시간에 풀어드립니다. 서신서 같은 구절을 두 번 반복해서 설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경으로 풀어드렸고, 두 번째는 우리 생활에서 그 말씀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활한 여러분. 죄가 뭘까요? 십계명을 어기는 것, 죄 맞습니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요. 타인을 존중하는 삶이 부활한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요. 분명히 해답이 나왔지요. 타인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의 자유함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것이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서신서의 말씀을 오늘 사는 길입니다. 3. 나의 자유함을 절제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말을 아껴야 합니다. 말이 시작이거든요. 하고 싶은 말 다하면, 그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며 곧 평화를 깨뜨리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말을 아껴야 하는 이유, 이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한 사람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가 나의 생활이, 내 생각이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 변화한다는 의미라고 했잖아요. 변화가 핵심이라고요. 세상은 이만큼 변했는데, 나만 예전과 똑같아요. 그럼 안 되는 거예요. 난 옛날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이젠 자랑이 아니라고요. 그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함께 살아난 이들의 모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전에 편하게 했던 말도, 지금은 때론 참아야 하는 겁니다. 교회도 변해가고, 세상도 이렇게 변해가는데 나는 옛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과거에 의미하던 바와 지금 세상에 의미하는 바가 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나만 그대로인 겁니다. 이는 평화를 깨드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게 됨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는 ‘함께’라는 개념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 주일세대통합예배가 이미 증명하고 있어요. 그런데 20년 전 예배와 지금 예배가 많이 다르잖아요. 모임도 달라졌잖아요.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의 개별성을 인정하고 타인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니,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예배드리다 보니, 더불어 예배드리다 보니, 예배도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 함께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 불가능해요. 내가 식당을 운영해요. 손님이 함께 와 주지 않으면 나는 망해요. 내가 회사를 다녀요. 우리 회사 물건을, 사업을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늘 식당에 오는 사람 입장, 우리 회사와 거래하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잖아요. 그렇게 메뉴를 내놓고, 사업을 하잖아요. 매번 변화하잖아요. 이건 넓은 의미의 타인에 대한 배려이잖아요. 그동안 광장에서 벌어졌던 일들. 다 기억하실 겁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란 털끝만큼도 없었지요. 그것이 교회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들이라 낯 뜨거움은 그저 우리의 몫이었지요.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니, 오늘 다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십시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나는, 한 살이 되는 겁니다. 지난 삶은 죽은 삶인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전보다 더 타인을 존중하며, 더 평화를 이루며 그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도 더 존중하며 ‘함께’ 나아가십니다. 말을 줄이고, 내 옆에 사람을 응시하며, 존중하며 살아가는 길, 그것이 죄를 짓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위해 살아가는 길임을 잊지 않고 오늘 다시, 부활의 삶을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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