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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준... 주님의 말씀 / 부활절 다섯째주일 /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장 본 목사 202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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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준... 주님의 말씀

 

부활절 다섯째주일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

20250518

 

전도서 4:1

1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요한21:4-11

4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5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새 계명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을 써 보내는 것입니다.

6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8 여러분은 스스로 삼가서, 우리가 수고하여 맺은 열매를 잃지 말고,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9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10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25-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2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2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일상에서 종종 떠올리는 생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학교에서는 한 반에 여러 학생이 함께 공부합니다. 여러 학생이 있다 보니,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지요.

 

특히 수업 분위기를 망치는 학생이 왕왕 있어요. 그래서 학교마다 비슷한 규율이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 할 말이 있으면 쉬는 시간에 한다. 수업 시간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등등 많은 규율이 있지요.

 

이걸 지키지 않으면 선생님께서 타이르기도 하시고, 엄하게 말씀하시기도 하죠. 목사님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많이 맞았어요. 떠든다고 맞고, 공부 못 한다고 맞고. 그래서 선생님이 몽둥이를 들면 모두 쥐 죽은 듯했답니다. 몽둥이가 곧 규율이었지요.

 

지금은 그런 폭력적인 모습이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교실 문화가 많이 달라졌어요. 참 다행입니다. 그런데 엄한 규율이 사라져서인지 몰라도 분위기를 망치는 학생에 대해 제지하는 것도 예전에 비해 어려운 것도 사실이죠.

 

그런 친구 있으면 이런 생각 들지 않나요? ‘쟤는 또 시작했어!’, ‘아이! 짜증나!’, ‘쟤는 누가 안 잡아가나?’, ‘우리 반은 맨날 왜 이러지?’, ‘쟤 때문에 트라우마 생기겠어!’, ‘~ 누가 나를 위로해 줬으면 좋겠다.’ 등등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힘들죠. 말썽꾸러기 친구에게 가서 뭐라고 하면 싸우게 될 테니까 포기하죠. 그럼 혼란스러운 상황은 반복됩니다. 마음은 더 힘듭니다. 어렵죠.

 

오늘 구약의 말씀에서는 그런 상황을 전하고 있어요. 세상에 온갖 억압적인 일들이 발생하는 거죠. 억눌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위로하는 사람이 없지요.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마구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지요.

 

아마 우리나라 역사에서, 일제강점기가 그랬을 거예요. 6.25한국전쟁이 그랬을 거예요. 그리고 45년 전 오늘,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겪었던 사람들이 그랬을 거예요.

 

해답은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말이죠. 교실에서 그런 일이 반복되듯이, 반복되었으니까요. 그런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런 상황 때문에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은 다른 친구를 배려하고, 교실 안에서 규율을 누구보다 잘 지켜내는 친구가 되었거든요.

 

또 친구가 힘들면, 나도 힘든데도 다가가서 괜찮아. 좋아질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거든요. 그런 어려움에서 조금씩 성장하면서 여러분은 멋진 어린이-청소년이 되어가고 있답니다.

 

거기에 하나 더! 괜찮은데... 좋아질 건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상황을 바라보면 멋진 친구에서, 멋진 신앙인으로 커갈 수 있답니다. 어려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어려움을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다섯째주일>이며, 교단이 정한 <5·18민주화운동기념주일>입니다. 마침 오늘이 518일이네요. 그래서 세 본문과 함께 우리 교단의 신학교인 한신대학교에서 45년 전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맞물려 가며 말씀 마당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트라우마갖고 있으신지요? 저는 회전문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남대문에 있는 동방프라자 빌딩 회전문 안에서 유리에 부딪쳐 거의 기절한 일이 있었거든요. 밖인 줄 알고 힘차게 나갔는데, 회전문 안에서 유리에 이마를 박고는 쓰러졌습니다. 저 지금도 사실은 회전문 있으면, 옆에 있는 미는 문으로 다닙니다. 여러분은 어떤 트라우마를 갖고 있나요?

 

트라우마. 재해나 큰일을 당한 뒤에 생기는 비정상적인 심리반응입니다. 어떤 일을 겪고는 비슷한 상황이나 일을 만나면 온몸이 굳어지고, 식은땀이 나거나 그러지요.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있지만, 집단적인 트라우마도 있어요.

 

전쟁을 겪었던 나라는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고, 수해를 당한 지역에 가면 주민들이 함께 겪는 트라우마가 있지요. 4월이 되면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겪는 트라우마도 있습니다. 5월이 되면 그 트라우마는 광주로 옮겨갑니다.

 

 

2. 올해 114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한 가지 결정을 내립니다. 1980108, 한신대에서 일어난 시위에 대해 당시 신군부가 전교생을 연행하여 관련 학생들을 형사처벌하고, 한신대 신학과 신입생을 2년간 강제 모집 중지한 사건에 대해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중대한 사건으로 판단하고 진실 규명을 할 것을 결정했지요. 아마 이런 일 벌어진 지도 모르는 분이 대부분 일 겁니다.

 

19805·18민주화운동 당시, 한신대 학생이던 류동운 군이 광주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2학기 개강을 하고, 한신대 학생들은 108일 류동운 학생의 추모예배를 드리고, 교정으로 나와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퇴진을 외치는 시위를 벌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5·18과 관련한 최초의 시위였습니다. 당시 5·18민주화운동은 뉴스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었으니까요.

 

이에 당시 신군부는 한신대 전교생 200여 명을 전원 체포했습니다. 그중 8명 구속, 세 명은 실형을 살았습니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은 이 사건으로 한신대를 없애버리려고 했지요. 하지만 대학을 자기 마음대로 없앨 수는 없었기에 2년 동안 신학과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하도록 강제 결정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진실화해위원회는 심각한 인권침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래서 한신대는 2년 동안 어쩔 수 없이 신학과로 입학하는 학생들을 인문대학 신입생으로 받아서 신학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현재까지 목회하고 있는 목사님들에게 올해 명예신학졸업증서를 수여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단 신학교 한신대학교는 19805·18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3. 복음서에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도들은 옷을 벗기고 거의 죽을 때까지 때리고는 그를 버려두고 가버립니다. 지나가던 두 사람은 죽을 지경인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칩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를 돕습니다. 돕는데 이렇게 돕습니다. 34절입니다.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올리브 기름은 비상시 사용하는 진통제 역할을 합니다. 포도주는 소독약 역할을 하고요. 우리 급한 상처에 소주 붓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어디에 부었나요? ‘상처에 부었습니다. 상처가 그리스어로 어떤 단어인지 아십니까? 바로 트라우마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트라우마의 어원이기도 하죠. 물론 성경에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생겨난 상처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덧나지 않도록 포도주로 소독하고, 덜 아프도록 올리브 기름을 부어주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어디 몸만 아팠겠습니까? 심리적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요? 33절에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고 전합니다. 측은한 마음. 상대방을 가엾고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여관으로 데리고 갑니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측은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 모양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다시 여관에 들러 두 데나리온을 주인에게 주고는 돌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훗날 갚겠다는 말도 잊지 않네요. 두 데나리온 정도면 당시 두 달 치 숙박비 정도 된답니다. 꽤 큰돈을 주인에게 맡긴 거죠.

 

이후 강도 만난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 성경은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인해 오늘날의 의미로 트라우마가 조금은 치유되고, 강도에게 당한 몸의 상처는 나았을 것입니다.

 

 

4. 그런데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율법교사에게 전하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이렇게 묻습니다. 36절입니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대답합니다. 37절입니다.

37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우리는 여기에서 율법교사의 대답을 잘 살펴야 합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은 상종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은 겁니다. 대답은 해야겠고, 그래서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많은 사람이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전하고 계십니다. ‘너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희가 그리 외면하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측은한 마음 지니고, 어떤 사람이든지 도우며 살아. 사마리아 사람처럼 살아가라고.’

 

율법교사의 대답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29절입니다.

29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율법교사는 비유를 듣기 전에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이 아니었어요. 25절 시험했다고 하잖아요. 예수를 깔본 겁니다. 영생에 관해 묻거든요. 자신은 영생에 대해 알고 있는 율법교사거든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을 들어 설명하시네요.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할 말씀입니다. 확인합니다. 27절입니다.

 

27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하였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하였습니다.”

 

28절에서 그럼 그대로 행하면서 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시험을 해봤는데 오히려 율법교사 자신이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다시 묻는 질문이 아까 읽은 29절이에요.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비유 끝에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오히려 물으시지요. 율법교사의 대답. 사마리아 사람인데도, 이렇게 말하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29절에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님에게 말했다 전합니다. 딱 그 수준의 대답입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틀린 대답 아닌데, 정답인데, 정답이 아닌 거죠.

 

교우 여러분.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첫째 상처받은 사람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요. 어려움에 처한 사람 말입니다. 트라우마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 상황으로 바꿔 볼게요.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외국인일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일 수도 있어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 말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율법교사가 말한 대답 말고, 그렇게 빙빙 돌려가며 정답인데도 불구하고 오답으로 말해버리지 않고, 모든 이를 끌어안을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 말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서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우리가 이웃으로 살아가는 길이 사랑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한 마음의 본질이 바로 사랑이라는 거죠. 사실 진정한 이웃으로 사는 길이 사랑이라는 것.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압니다. 이미 복음서에서 율법교사가 말한 27절의 대답을 통해 확인했거든요.

 

그런데 사랑이 맞기는 한데, 기준이 있어요. 사랑의 기준 말입니다. 확인합니다. 요한216절입니다.

 

6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준이 뭘까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라고요. 하나님께 들은 대로, 배운 대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당연한 이 말을 왜 하고 있는 것일까요? 7절입니다.

 

7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속이는 자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이들, 적대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지난주 설교를 통해 말씀드릴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자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오늘 서신서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게 어떻게 우리가 대해야 할지 전하고 있습니다. 10, 11절입니다.

 

 

10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만히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왜 그럴까요? 여러분도 그리될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 고상한 율법교사 조차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6.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내가 아프듯, 우리 이웃도 모두 아픔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가 쉽지만은 않아요. 그런데 이웃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는 있습니다. 놀랍지 않나요? 트라우마를 가진 내가 다른 트라우마를 가진 이웃을 보듬어 줄 수 있다고요. 사마리아 사람도 유대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가진 우리 같은 사람 아니었을까요?

 

우리 이웃은 누구일까요? 자비를 베푼 사람 맞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가 한 그 대답, 정답이지만 오답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했어야 했다고요. 그 대답 안에는 나는 당신보다 고귀해. 당신들은 천박해.’ 이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고요. 이건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아니죠.

 

우리의 대답은 이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내 옆에 있는 당신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이 땅에 소외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역사를 너머, 역사를 통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으로, 사랑이긴 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래서 만인의 트라우마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신앙인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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