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그리고, 신앙의 방향성 / 성령강림주일 | 장 본 목사 | 2025-06-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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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성령 그리고, 신앙의 방향성 성령강림주일 총회선교주일 20250608 사도행전 4:23-31 23 베드로와 요한은 풀려나는 길로 동료들에게로 가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한 말을 낱낱이 일렀다. 24 동료들은 이 말을 듣고서, 다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아뢰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25 주님께서는 주님의 종인 우리의 조상 다윗의 입을 빌어서, 성령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이 날뛰며, 뭇 백성이 헛된 일을 꾀하였는가? 26 세상 임금들이 들고일어나고, 통치자들이 함께 모여서, 주님과 그의 메시아에게 대적하였다.’ 27 사실,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여, 28 주님의 권능과 뜻으로 미리 정하여 두신 일들을 모두 행하였습니다. 29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30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31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옛날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 여러분에게는 설교 서론이기도 하니까요. 잘 들어 주세요. 토끼 한 마리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잡니다. 좀 깊게 잠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과가 땅에 떨어집니다. ‘쿵!’ 그 소리에 토끼는 깜짝 놀랍니다. 세상이 무너진 줄 알고 냅다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토끼가 달리자 숲에서 풀을 뜯고 있던 다른 짐승들도 덩달아 뛰기 시작합니다. 토끼 뛰는 모습이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행여 나도 어떻게 될까 두려워 뛰기 시작합니다. 숲은 뛰어다니는 짐승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답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토끼는 왜 뛰기 시작했나요? 짐승들은 왜 뛰기 시작했나요? 그 이유, 토끼도 모르고 짐승들도 모르죠. 토끼는 놀라서 뛰고, 짐승들은 토끼가 뛰니까 나도 뛴 거죠. 남이 달리니까 나도 달리는 거죠.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그리고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 있다면, 최소한 어디인지는 알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랍니다. 그 마음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다 알 순 없어요. 여러분 열심히 공부하는데, 여러분이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모르잖아요. 정말 알 수 없어요. 다만,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마땅히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에게는 어떤 예수님의 마음인지 하나만 말씀드릴게요. 바로 ‘사랑’이에요. 사랑을 향해 가는 거라고요. 사랑하기 위해 가는 거라고요. 그렇게 여러분은 사랑받고 있다고요. 늘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난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가는 사람이야’라고 가슴 한켠 고백할 수 있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신앙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했지요? 그 길 중 하나는 ‘사랑’이라고 말씀드렸지요? 하나 더 말씀드린다고요. 신앙인은 바로 ‘사랑과 공의’를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셨다는 것 정도는 이제 아시는 여러분이잖아요. 하나님의 공의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왜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수 있을까요?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테니까요. 부활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에 전파될 수 없었으니까요. 부활이 없었다면 오늘 은진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우리도 없었을 테니까요. 우리는 결국,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요?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전합니다. 예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공의를 말이죠. 그 시작은 바로 베드로였습니다. 2. 사도행전은 성령의 약속과 예수의 승천, 그리고 한 자리가 빈 열두 제자를 맛디아로 다시 완성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성령 임재의 사건이 일어나죠. 그 일로 말미암아 베드로는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니,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못 걷는 사람을 고쳐내기까지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거죠.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예수를 전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죠. 자기 스승 예수가 그러다가 사형을 당했거든요. 그 길을 똑같이 베드로가 따라가고 있는 겁니다. 제사장, 사두개파 등 예수를 죽였던 사람들이 베드로를 잡아 가둡니다. 성경은 그들이 격분했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를 죽이고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엄중 경고합니다. 어떻게 경고했는지 확인합니다. 사도행전 4장 18절입니다. 18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경고를 받고 풀려나는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23절, 다른 제자들에게 있었던 일을 말합니다. 24절, 이 말을 들은 동료들은 다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도는 30절까지 이어집니다.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29절입니다. 29 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제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용기를 달라고요. 우리를 지켜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제사장들, 사두개파 사람들을 죽여달라고 기도하지 않아요. 그들이 멸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저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리가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세상에 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성령이 임한 제자들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싶습니다. 이어서 확인합니다. 30절입니다. 30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의 손을 뻗치시어 병을 낫게 해주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구합니다. 그 능력으로 치유해 달라고,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에요. 제자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목사의 능력이 아니라고요. 부자의 능력도 아니고, 권력있는 자들의 능력이 아니라고요. 오직 주님의 능력, 예수의 이름이라고요. 3.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방향성요! 방향성을 말하고 있다고요. 신앙의 방향성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나의 문제에만, 나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한 우리 믿음은 절대 깊어지지 않아요. 문제 자체보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 신앙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명이 어려우셔요? 예를 들어드립니다. 최근 어느 중학생이 학교에서 야구방망이로 선생님을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 5호선에 불을 질렀어요. 이럴 때 대부분 화살을 폭행한 학생, 방화를 저지른 사람에게만 돌립니다. 그 사람의 문제로만 인식하죠. 가정환경, 정신병적 징후, 혹은 트라우마 등... 모두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려는 경향인 거죠. 물론 개인적인 문제, 개인적인 상황이 이유이기도 하겠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하는 부분은 ‘공적인 영역’입니다. 사회 구조적인 부분요. 이 사회가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뜬금없이 세상 이야기라고요? 아니요.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라는 시스템에 반하여 늘 한 사람의 생명에 관심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다 나오잖아요. 여러분이 증인이잖아요. 그렇게 살다가 살다가 죽기까지 하셨잖아요. 예수님 혼자 잘 먹고 잘 살다 죽으신 것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늘 공적인 영역에 마음을 쓰신 분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죽인 거잖아요. 자신들의 시스템을 부인하니까요. 어라? 그런데 제자들이 이제 그 삶을 이어받네요? 예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일하셨던가요? 제자들이 그들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었던가요? 그래서 주님의 능력을 바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정확하게 우리가 바라볼 신앙의 방향성이 공적인 영역까지 확장되었네요. 다만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4.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세상의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31절입니다. 31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입니다. 새한글 성경에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거리낌 없이 전하게 된 이유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 차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헤아리게 합니다. 그 헤아림이 하나님께서 애달픈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을 더해 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용기’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서가 아닙니다. 여전히 답답하고 막막할 수 있어요. 위협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홀로 용기내어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 용기를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고 간구하십시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우리는 ‘새벽의 집’ 분들을 초청하여 섬기려고 합니다. 용기를 내야만 했던 이유가 섬김에는 채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교우 여러분이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용기를 내어 신앙생활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믿음은 ‘소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용기는 곧 소망으로 향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용기와 소망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이 무엇인지 설명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활주일을 거쳐, 함께 섬김을 준비하며 온 길이 바로 성령이 함께 하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은진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고, 그 용기로 말미암아 소망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온전히 주님을 향한 방향성으로 우리의 삶을 가꿔가는 신앙인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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