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罪)와 의(義)의 상관관계 / 성령강림후 둘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06-22 | |||
|
|||||
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죄(罪)와 의(義)의 상관관계 성령강림후 둘째주일 20250622 이사야 54:1-8 1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의 장막 터를 넓혀라. 장막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라. 너의 장막 줄을 길게 늘이고 말뚝을 단단히 박아라. 3 네가 좌우로 퍼져 나가고, 너의 자손이 이방 나라들을 차지할 것이며, 황폐한 성읍들마다 주민들이 가득할 것이다. 4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가 이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당황하지 말아라! 네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수치를 잊으며, 과부 시절의 치욕을 네가 다시는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5 너를 지으신 분께서 너의 남편이 되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너를 구속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불릴 것이다. 6 버림을 받아서 마음이 아픈 너를, 주님께서 부르신다. 젊은 나이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받은 너를, 주님께서 부르신다.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8 분노가 북받쳐서 나의 얼굴을 너에게서 잠시 가렸으나 나의 영원한 사랑으로 너에게 긍휼을 베풀겠다. 너의 속량자인 나 주의 말이다.” 로마서 6:15-23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6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이해력이 미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의 종으로 내맡겨서 불법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바쳐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21 여러분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이제 와서 여러분이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지마는, 그러한 생활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의 삯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재미있는 한자 공부를 해 보려 합니다. 주보를 보세요. 설교 제목을 읽어 봅니다. <죄(罪)와 의(義)의 상관관계> 어렵죠? 죄와 의의 상관관계는 뭘까요? 목사님도 몰라요. 그래서 같이 공부해 보려고 해요. 죄라는 단어의 한자를 보세요. 罪. 허물 죄 자에요. 그런데 한자를 자세히 보면 위에 옆으로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이 있죠? 세 칸으로 나뉘어 있잖아요. 그 글자 그물 망(罒)자랍니다. 그럼 아래 생선 가시같이 생긴 글자만 남잖아요. 그건 아닐 비(非)자랍니다. 즉 죄라는 단어는 그물 망 자에 아닐 비 자가 합쳐진 거예요. 아닌 건 다 그물로 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럼 하나 질문이 생기지요. 아닌 건 뭘까요? 한자 의미로는 옳은 것이 아닌 것, 옳은 것에 위배되는 것을 의미해요. 그래서 허물 죄(罪)는 옳은 것에 위배된 것을 그물로 다 잡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죄지었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이번엔 의(義) 자를 봅니다. 옳을 의입니다. 역시 한자를 보면 둘로 나눌 수 있어요. 위에 아름다울 미자 비슷하게 생긴 글자와 아래 글자로 나눌 수 있지요. 위 글자는 양 양(羊) 자에요. ‘음메~’ 하는 양이요. 아래 글자는 나 아(我)랍니다. 나를 뜻하는 겁니다.
그럼 해석이 애매해지죠. 양과 내가 무슨 상관일까요? 양에는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라는 뜻이 있어요. 그러니 옳을 의 자는 ‘내가 밖으로 드러난 모양’이 되겠지요. 그래서 공의(公義)라고 하면 공적으로 드러나는 옳음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공의라고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에게는 오늘 이렇게 죄와 의, 두 글자를 설명하는 것으로 말씀을 마칠게요. 대신 어른들은 설교를 하는 동안 두 단어의 어원을 계속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죄는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거예요. 의는 나를 통해 드러나는 옳은 일이에요. 간절히 원하기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모두 의를 향해 커가는 멋진 신앙인이 되어 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퀴즈 하나 드립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셨죠? 그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 ‘죄를 지어야 합니다.’ 웃기기도 하고, 웃기지도 않는 이 정답은 실제 초대 공동체에서 있었던 중요한 논쟁 중 하나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어.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있지 않아. 심판 날에도 우린 괜찮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율법 무용론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이런 표현 많이 하죠. ‘값없이 받은 은혜’라고요. 맞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시죠. 그렇다고 그 은혜가 싸구려라는 말은 아니에요. 값을 매길 수 없는 거죠. 그런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변질시킨 사람들이 바로 율법 무용론자들이었습니다. ‘은혜받았으니, 난 나대로 살 거야.’ 이렇게 되는 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닌 거죠. 은혜를 왜곡한 거죠. 오늘 로마서 6장의 말씀이 바로 주님의 은혜를 싸구려로 전락시켜 죄의 핑계 거리로 삼는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6장 15절입니다. 15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시나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시죠. 바울은 율법에 따라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죠.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받아 누리는 은혜를, 나를 아무렇게나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거죠.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옳을 의(義) 자가 나의 옳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 옳음의 기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어야 하는 건데, 그 옳음의 기준이 내 맘대로 살아, 내 생각대로 살아 드러내는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나의 모습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의(義)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드러나게 되면, 그건 죄(罪)가 되는 겁니다. 옳지 않은 것이 되고, 그물로 다 잡히게 되는 거죠. 그렇게 내가 옳지 않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17절 18절입니다. 17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18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의 종. 내가 옳지 않음에 사로잡힌 상태. 그런데 복음을 만나서 내가 복음을 따릅니다. 그 상태. 죄에서 해방받은 상태. 그래서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다고 바울은 전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이 매우 신학적이어서 어렵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쉽게 풀어 주십니다. 20절입니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일 때에는 의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드러내는 모습이 옳은 길이 아닐 때는 의에 얽매이지 않는다고요. 내가 죄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요. 난 다 옳다고 생각한다고요. 진정한 의가 뭔지를 모르니까요. 그 의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데, 내가 옳다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주장하니까 내가 뭘 잘못하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주 서신서 말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 있었잖아요. 잘난 척하지 말고, 상처 주지 말고, 질투하지 말라고요. 죄의 종일 때는, 즉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나 있을 땐 내가 뭘 잘못하는지도 모르고, 내 주장만 하고 있다는 겁니다. 21절에 그런 삶에서 무슨 열매를 거두었냐고 물으시잖아요. 죽음이라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믿고 따르면 그 삶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22절입니다. 22 이제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은 죽음이라는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맞습니다. 그렇다고 값싼 은혜는 아닙니다. 거저 주신다고 공짜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 은혜에는 은혜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책임성이 부여되는 겁니다. 지난주 말씀을 또 드리자면 은혜받은 사람은 뽐내지 않고, 상처 주지 않고, 시샘하지 않는다고요.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그 가르침대로 의에 머물며 살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나를 드러내면 그것이 신앙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는 겁니다. 이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 살아가는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복음서에 등장하는 삭개오는 여리고 지방의 세관장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가리켜 '허가받은 도둑'이라 부르며 멸시했습니다. 그러니 세관장 삭개오는 허가받은 도둑들의 우두머리였던 것이죠. 그렇게 부정하게 축재해서 모은 재산으로 부자가 되었던 인물이 바로 삭개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돈은 벌 만큼 벌었으나 아무도 자신의 인생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여리고의 왕따 인생이 된 거죠. 그런 삭개오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로 결심합니다. ‘길은 하나뿐, 예수님을 만나자. 가질 만한 것 다 가졌는데 왜 나는 왕따 인생이 되었는가? 길은 하나뿐이다. 예수님을 만나자!’ 드디어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도착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를 따르는 군중 속으로 뛰어나갑니다. 하지만 키 작은 삭개오, 군중 사이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려는데 사람들이 팔꿈치로 툭툭 쳐냅니다. 이마가 뒤로 젖혀집니다. 뒷발질로 차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저히 예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람들은 '너는 예수님을 만나러 갈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삭개오. 그럴수록 예수님이 더 보고 싶어집니다. 하는 수 없이 예수님 일행보다 앞서 있는 뽕나무를 향해 달려갑니다.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 저기 다가오는 군중을 내려다보며 '누가 예수님일까? 저 분일까? 저 사람은 베드로라는 제자일까? 나한테 오셔서, 나를 아는 척이나 해 주실까?' 삭개오의 마음에는 조바심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뽕나무 아래에 오신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삭개오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불러 주셨어!’ 누가복음 19장 5절입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삭개오. 예수님 말씀에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릅니다. 급히 내려와 기뻐하며 예수님을 모십니다. 나를 불러 주시는 그 희망의 음성을 듣고 바로 내려와서 주님을 모십니다. 세관장만 되면, 부자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모든 사람이 따돌리는 왕따 인생이었습니다. 거기에 행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신 순간, 삭개오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7절입니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죄인이랍니다. 옳지 않은 일을 하도 많이 해서 그물에 넘치도록 잡힌 상태가 죄라고 했잖아요. 그 죄인이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말이 마치 자신이 구원받지 못해 질투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삭개오도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내가 잘못 살았습니다. 지금껏 정말 헛산 듯싶습니다. 이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아니, 내가 너무 많이 가졌기에 가난해지고 불쌍해진 저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겠습니다. 세관장의 공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착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네 배로 갚도록 하는 것은 악질적인 강도에게 내리는 징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스스로 강도처럼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나의 인생이 방향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워진 것입니다. 이제 새 사람이 된 거죠. 바로 이것이! 주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사건이 쉬워 보이시나요?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바로 앞 장인 누가복음 18장 18절 이하에서는 삭개오와 아주 대조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몹시 근심하여 돌아가고 맙니다. 성경은 “그가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23절)”라고 전합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누군가는 근심합니다.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적 초청에 응하는 것을 의미하죠. 초대에 응한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는 부자 관원은 그저 근심을 안고 돌아갑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투덜대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왜 나한테만 안 오시는 거야? 왜 내게는 초청을 해 주시지 않는 거야? 아니요. 그것은 나에게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초대에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인격적 초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불만입니다. 18장에 심히 근심하며 돌아가는 부자 관원처럼 내 것을 움켜쥐고, 내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기에... 내 자녀, 내 가족의 행복만 추구하며 살기에... 그렇게 내 의를 드러내며 살기에 예수님의 초청을 받을 수도 없고, 받아도 응답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것이 내 인생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이유가 바로!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주님 안에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여리고에서 내놓은 인생 삭개오. 그의 집에 거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예수가 죄인의 집에 묵으러 간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한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함을 받습니다. 주님의 공동체에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잃은 것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오늘 다시 만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초청에 머뭇거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죄와 의의 상관관계’가 무엇일까요? 둘은 반대의 개념도 아닙니다.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옳은 것에 대해 전제하고 있다는 겁니다. 옳은 것을 옳지 않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옳은 것을 나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 의입니다. 세상에서 죄의 기준은 법이 될 겁니다. 법을 지키지 않으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잖아요. 그럼 믿는 사람의 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면 죄입니다. 즉 의를 비틀어버리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조심할 것은 믿는 우리도 자칫 주님의 말씀을 비틀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삭개오는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의 초대에 고민합니다. 고민하면 말씀은 비틀어집니다. 주님의 초대라면 그대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길이며, 믿음이며, 사명입니다. 초대에 응답하는 삶, 이것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죄가 아닌 의에 머물게 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삭개오의 응답처럼, 우리도 주저하지 않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아멘’으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