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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을까요? /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장 본 목사 202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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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믿을까요?

 

성령강림후 다섯째주일

20250713

 

스가랴 4:1-14

1 내게 말하는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는데, 나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2 그가 나에게 무엇을 보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였다.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를 봅니다. 등잔대 꼭대기에는 기름을 담는 그릇이 있고, 그 그릇 가장자리에는 일곱 대롱에 연결된 등잔 일곱 개가 놓여 있습니다.

3 등잔대 곁에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하나는 등잔대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등잔대 왼쪽에 있습니다.”

4 나는 다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었다. “천사님,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에게,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느냐고 묻기에, 천사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6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그가 머릿돌을 떠서 내올 때에, 사람들은 그 돌을 보고서 아름답다, 아름답다!’ 하고 외칠 것이다.”

8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9 “스룹바벨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으니, 그가 이 일을 마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0 “시작이 미약하다고 비웃는 자가 누구냐? 스룹바벨이 돌로 된 측량추를 손에 잡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이 일곱 눈은 온 세상을 살피는 나 주의 눈이다.”

11 나는 그 천사에게 물었다. “등잔대의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는 무엇을 뜻합니까?”

12 나는 또 그에게 물었다. “기름 담긴 그릇에서 등잔으로 금빛 기름을 스며들게 하는 금대롱 두 개가 있고, 그 옆에 올리브 나무 가지가 두 개 있는데, 이 가지 두 개는 무엇을 뜻합니까?”

13 그 천사가 나에게, 그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르겠느냐고 묻기에, 나는 천사에게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14 그 천사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와 가지 두 개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을 섬기도록, 주님께서 기름 부어서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고린도전서 12:1-7

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2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7:5-10

5 사도들이 주님께 말하였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6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7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8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하지 않겠느냐?

9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 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여라.”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두 가지 역사 이야기를 드리면서 말씀마당을 시작합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출애굽 사건 아시죠?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끌어 주신 사건입니다. 너무나 중요해서 구약 두 번째 책으로 따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또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여서 이집트 왕자라는 제목으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어요. 굉장히 인기가 많았던 영화였답니다.

 

여러분 3·1만세운동 아시죠? 어떤 사건인가요?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던 우리 백성들이 1919년 전국에서 벌인 독립만세운동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잘 아는 유관순 열사께서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죽게 되지요. 아마 이 두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두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겁니다. 팩트(fact)라는 거죠. 또 다른 공통점이 있어요. 억압한 나라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역사라는 겁니다.

 

이집트의 역사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사책에는 자신들이 점령한 작은 한 민족이 벌인 탈출극 정도로 치부하지요. 일본의 역사책에는 3·1만세운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폭동일 뿐이죠.

 

분명한 역사적 사실인데, 왜 억압한 나라의 역사에는 이러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지 않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은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뿌리와 같은 사건입니다. 3·1만세운동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루게 한 시작이 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그들, 이집트와 일본의 역사에는 왜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요?

 

그건 이집트와 일본의 측면에서 보는 역사에 관한 관점이 이스라엘과 대한민국 측면에서 보는 역사적 관점과 다르기 때문이에요. 이집트나 일본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은 자신들이 식민 지배하던 민족이 일으킨 폭동에 불과합니다. 그저 하나의 사고일 뿐이에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의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국가로 설 수 있게 된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이 역사를 보기에 중요한 이야기, 중요한 사건이 되는 거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아세요? 바로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런데 그 역사를 통해 우리가 오늘, 그리고 내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무엇을 믿기보다, 어떻게 믿고 있는지가 훨씬 중요하답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그 옛날 이스라엘을 이끄셨던 하나님을 오늘 나의 삶도 이끌어 주실 하나님이라고 믿는 신앙인으로 커 가길 바라요. 그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길이랍니다. 주님의 이끄심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소망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이어집니다. 억압한 나라의 역사에 출애굽 사건과 3·1만세운동이 쓰여있지 않은 이유를 다시 한번 풀어드립니다.

 

정답을 드리기보다, ‘역사의 속성을 알려드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사실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 관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건 자체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의 삶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관점은 다가올 미래를 좌우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집트의 관점에서, 일본의 관점에서 이 사건들을 보세요. 식민 지배하던 민족이 야반도주하고 폭동을 일으킨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십시오. 이 사건을 평가하면서 나라가 나아가야 할 길을 만들어 오지 않았을까요?

 

쉬운 예 하나 더 들어드리죠. 대한민국의 현재 대통령은 이재명입니다. 직전 대통령은 윤석열이지요. 그 이전 19대 대통령은 문재인, 18대 대통령은 박근혜입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건 못 바꿔요.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현재 대통령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제외하고요. 직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역사적 시각과 관점은 어떨까요? 우리 겪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기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지요. 지금 대통령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요. 그런데 압도적으로 정권이 바뀌었어요. 왜요? 직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국민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사실보다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성립하는 겁니다. 왜냐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현재와 미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 역사에 관한 말씀을 서론으로 드린 이유,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린 이유, 오늘 세 본문을 봐야 하는 우리의 시각과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약은 스가랴서의 말씀입니다. 스가랴는 학개, 말라기와 함께 포로기 이후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포로 기간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지에서, 유배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함께 했던 예언자가 스가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옆에 있던 사마리아와 주변 나라들이 성전 건축에 반대합니다. 망한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기 싫었던 거죠. 그래서 2년여 동안 공사가 중단되었지요. 그 무렵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주변 나라들은 성전도 짓지 못하게 합니다. 스가랴서는 다시 희망 고문에 빠진 백성들에게 여러 환상으로 다시 민족이 일어날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순금으로 만든 등잔대”, “머릿돌”, “성전의 기초등등요.

 

지금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 옛날, 위대한 왕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나왔던 단어들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순금으로 등잔대를 만든들, 솔로몬 시대의 등잔대와 비할 수 있을까요? 지금 성전의 머릿돌을 세운들, 솔로몬이 세운 머릿돌보다 클 수 있을까요? 지금 성전의 기초를 쌓은들, 솔로몬의 기초보다 넓을 수 있을까요?

 

과거 역사적 사실에 비추면 현재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무엇 때문에 솔로몬의 역사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단 하나입니다. 솔로몬 영광의 시대를 만들어 주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난 역사를 기억하고 바라본다면, 지금은 주변 나라의 어깃장으로 중단된 성전 건축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겁니다. ‘솔로몬 때의 성전을 우리는 지금 지을 수 없어!’라고 지나온 역사를 떠올리며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영광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역사도 이끌어 주실 거야!’라고 일어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역사는 사실보다,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은 새 시대를 준비해 갑니다. 함께 예배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믿고 나아가야 할 것은 과거의 영광을 어떻게 재현할까 고민하며 주춤거리는 몸짓이 아닙니다. 새 역사를 쓰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믿음과 신앙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역사를 함께 바라보며 나아가는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고린도전서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새롭게 바라봐야 할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요.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내려주신 재능을 뜻합니다. 옛날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일을 은사라고도 합니다. 즉 높은 뜻을 가지신 이의 은혜로운 하사품이 바로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1절과 2절입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2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나 바울은 여러분이 신령한 은사에 대해 모르고 지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이 주신 재능에 대해 모르고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말씀입니다. 왜요? 2절에 나옵니다. 고린도 공동체를 섬기던 여러분이 예수 믿기 전 우상을 섬길 때 이유도 모르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유도 없이 우상을 믿고 끌려다니는 것 보다, 그러면서 어깨에 힘주며 다니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낫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달라지는데요? 3절입니다.

 

3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는 저주받을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못한다고요. 그래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성령으로 힘입은 사람뿐이라는 말입니다.

 

! 보세요. 3절까지 확인하니, 하나의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성령으로 힘입은 사람이라는 사실이지요. 앞으로 구주로 고백할 것이 아니라, 이미 고백했고, 성령으로 힘입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오늘 고린도전서 121절부터의 말씀은 이미 복음을 믿고 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말씀은 시대를 넘어 2025년 은진교회를 섬기는, 그중에서도 오늘 주일세대통합예배를 드리는 교우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고린도 공동체에 주신 말씀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4-6절입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짧은 이 세 구절 속에 기독교의 핵심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6절부터 볼까요? 마지막 부분, 모든 사람에게서 일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라고 전합니다. 여러 사람이 일하기에 그 일에서 나타나는 성과 즉 역사는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한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일은 무엇일까요? 5절 첫 단어에 나옵니다. “섬기는 일그것은 섬기는 일이다. 섬기는 일도 여러 가지다. 그런데 그 섬김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일이다.

 

그럼 그것이 구체적으로 현실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4절입니다. 은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을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풀어드립니다. 은진교회가 있어요. 제가 목사고, 장로님이 한 분 계십니다. 네 분의 시무권사님이 계시고, 네 분의 서리집사님이 계십니다. 그렇게 제직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누군가는 노래를 합니다. 누군가는 밥을 지어 주시고, 누군가는 재정을 정리해 주십시다. 어떤 분은 스피커에 나오는 소리를 잘 잡아주시고, 어떤 분은 설거지를 해 주십니다. 어떤 분은 청소를 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화단을 예쁘게 꾸며 주십니다. 그렇게 은진교회를 함께 만들어갑니다.

 

자 보세요! 그렇게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그 은사는 성령님이 주신 겁니다. 같이 모여 예배하며, 섬기며 주님을 알아가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사로 하는 일은 은진교회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 즉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성령께서는 누가, 어떻게 부족한지 아시고 그 부족함을 채울 다를 은사를 가진 분을 보내 주신다는 겁니다.

 

제가 기타밖에 못 치니까, 예배 음악을 더 풍성하게 해 주시는 피아니스트를 보내 주시는 겁니다. 이숙재 권사님께서 편찮으셔서 우리에게 만찬을 준비해 주시지 못할 때, 박순심 권사님, 한명구 권사님, 김강종 준목님을 보내셔서 더 풍성하게 섬기게 하시는 겁니다. 차도 마셔야 하니, 최고의 바리스타 이희윤 성도님도 보내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실 때 혼자서 잘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어떤 일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채워주시기 위해 보내 주신 동역자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행할 때 내가 섬기는 이는 오직 주님이요, 그 일을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위 분들과 이렇게 인사합니다. “당신은 나의 동역자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입니다.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때문입니다. 하나님 당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 좋으려고, 당신께서 부귀영화를 누리시려고 그러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이유, 바로 우리 공동의 이익을 얻게 하려고 하시는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이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만이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래서입니다.

 

역시, 역사는 사실보다,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하단 말입니다. 이천 년 전 사도 바울의 역사를 우리가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교회에 소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위 분들과 격려합니다. “당신을 위해 사랑하며 애쓰겠습니다.”

 

 

4. 오늘 복음서의 말씀은 좀 매정하기도 하고, 낯설어 보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없는 이라는 존재의 임무와 자세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등의 관점에서 종은 사라져야 하기에 오늘 우리가 읽기에는 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합니다. 그 당시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을 읽는다면 그런 불편함은 해소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 주인은 종에게 자기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고 말하는 사람이지, 그와 겸상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래서는 안 되죠. 부당한 거죠. 하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라면, 한 번 짚어 봐야 할 중요한 대목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 여러분 마음에 지금도 유효하신가요? 주님이라고 하는 고백, 지금도 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는 이 길에 대해 하나님께 대가를 요구하지 마십시오. 이게 쉽지 않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오른쪽, 왼쪽에 앉혀 달라고 말했거든요.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그보다 더한 은사가 없었을 텐데도, 제자들조차 그랬다고요.

 

주님을 섬기는 일을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을 섬기는 일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가와 보상을 바라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신다면야 그저 은혜로 받는 선물일 뿐이지요. 내가 바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보상심리가 신앙생활을 무척 괴롭게 합니다. ‘나 이 만큼 했소. 하나님. 나한테도 이만큼 해 주쇼.’ 신앙은 ‘give and take’가 아닙니다. 주고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내 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이며 믿음입니다.

 

 

5. 역사는 사실보다, 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중요합니다. 우리 역사에 3·1만세운동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으로 인해 자주·독립·민주·정의로운 국가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어떤 세상을 꿈꿔야 하는지 미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의 환상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비참한 현재를 다시 이끌어 주실 분이 하나님임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공동체에 주신 은사의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섬김 하나하나를 시기와 질투가 아닌, 감사의 선물로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과 이런 관점이 모이고 모여서 주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어떻게 믿을까?’를 만들어 갑니다.

그 길, 끊임없는 감사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 길, 우리가 가야 할 신앙인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점을 늘 주님께로 향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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