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07-27 | |||
|
|||||
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할렐루야 성령강림후 일곱째주일 20250727 미가 4:1-4 1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주님의 산이 산들 가운데서 가장 높이 솟아서, 모든 언덕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우뚝 설 것이다. 민족들이 구름처럼 그리로 몰려올 것이다. 2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3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요한계시록 19:1-4 1 이 일이 있은 뒤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있는 큰 무리가 내는 우렁찬 음성과 같은 소리가 이렇게 울려왔습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력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다. 2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음행으로 세상을 망친 그 큰 창녀를 심판하셨다. 자기 종들이 흘린 피의 원한을 그 여자에게 갚으셨다.” 3 그들이 다시금 “할렐루야, 그 여자에게서 나는 연기가 영원히 올라가는구나” 하고 외치니, 4 스물네 장로와 네 생물이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아멘, 할렐루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5:31-46 31 “인자가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에 둘러싸여서 올 때에, 그는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 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 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단어 하나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우리 찬양할 때 가사로 무척 많이 나오는 단어기도 하고요. 목사님이 강단에 오르면서 교우들에게 인사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목사님이 ‘할렐루야’라고 말하면 회중은 보통 ‘아멘’이라고 응답합니다. ‘할렐루야’가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하나님을 찬양하세요!’라는 뜻입니다. 두 단어가 합해진 단어입니다. ‘할렐루’와 ‘야’가 합해진 거죠. ‘할렐루’는 동사에요. 찬양하라는 뜻이죠. ‘야’는 ‘야훼’의 줄임말이에요. ‘야훼’는 하나님을 구약시대에 부르는 명칭이었습니다. 여호와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할렐루야’라고 하면 ‘여호와를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랍니다.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히브리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데,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여러분 어떨 때, 찬양해요? 상대방을 칭송할 때 그렇지 않나요? 쉬운 예로, 게임한다고 칩니다. 게임 고수들 있잖아요. 어려운 스테이지 나는 맨날 죽는데, 고수는 기가 막히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그럴 때 채팅창에 이렇게 쓰잖아요. Goat! 라고요. Goat는 ‘Great Of All Time’의 줄임말이죠. 이 시대에서 최고라고는 뜻이잖아요. 우스개로 그러잖아요. ‘찬양하라~’ 이렇게요. 찬양은 멋진 상대방을 칭송할 때 나오는 거랍니다. 사람 사이에도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는 사람들이죠. 그걸 한 단어로 ‘할렐루야’라고 말한답니다.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한 책, 신약에서 한 책에서만 나온답니다. 구약은 시편에서만 나와요. 신약은 오늘 읽은 계시록에만 나오는 단어랍니다. 다른 책에서는 나오지 않아요. 시편은 그 옛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였으니까 ‘할렐루야’라는 표현을 23번 사용하고 있지요. 서신서에서는 오늘 읽은 부분에서 세 번, 다음에 한 번 더 나와서 총 네 번만 나옵니다. 흔한 단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렐루야’라고 하면, 하나님을 지극히 존경한다는 의미가 되는 거예요. 목사님도 정말 감사한 일이 생기잖아요? 그럼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한답니다. ‘할렐루야’라고요. ‘할렐루야’는 단순한 감탄사가 아니랍니다. ‘할렐루야’는 우리 신앙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과 감사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삶의 많은 부분에서 ‘할렐루야’를 외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요즘 성령강림후 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 성령강림후 절기 세 본문 말씀을 보면 특정한 주제에 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날’입니다. 성경은 주님의 날을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그날’이라고도 합니다. ‘메시아의 날’이라고 하기도 해요. ‘구원의 날’이라고 하기도 하고 ‘심판의 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모두 ‘주님의 날’을 다르게 표현하는 말들이지요. 지난주 구약의 말씀은 시작부터 좀 무서웠잖아요. “너희는 망한다!”라고 시작했던 아모스서 말씀 기억나시죠? 그래서 그날은 무서운 날이기도 하고, 구원의 날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이상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황이라고 가정해 볼게요. 그들에게 그날은 희망의 날이 아닐까요? 구원의 날이 아닐까요? 지난주 아모스서에서 이스라엘은 풍요로운 상황이라고 했었지요. 예배와 삶이 달랐던 그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면 멸망할지 모른다고 경고했잖아요. 그렇다면 이때의 그날은 심판의 날이겠지요. 이렇게 그날은 백성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인식할 수 있는 날이랍니다. 오늘 미가서는 그날의 또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미가는 북이스라엘이 아수르에게 멸망한 모습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 눈으로 자신이 사는 남유다를 바라봅니다. 멸망한 북이스라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남유다의 모습이었죠. 미가는 그 시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유다에 그 말씀을 전합니다. 내용은 아모스와 비슷해요. 유다의 예배와 예물은 이미 타락한 지 오래거든요.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는 그들의 모습이었지요. 미가는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이 좀 격해요. 미가서 3장을 보면 악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뜯어내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백성을 잡아먹는다고까지 하죠.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페허 더미가 되고 성전이 있는 곳은 풀만 무성한 언덕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지요. 이런 경고 이후에 주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를 전하고 있어요.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미가서 4장 3절과 4절입니다. 3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원근 각처에 있는 열강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4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 이것은 만군의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다. 칼을 조각내 쟁기 날을 만듭니다. 창을 조각내 낫을 만듭니다. 사람을 죽이던 무기로 사람이 먹을 양식을 재배하는 농기구를 만듭니다. 칼이 없으니 서로 칠 일도 없겠네요. 군사 훈련도 필요하지 않겠네요. 자신이 심은 나무 아래 앉아서 살 수 있겠네요. 이것이 평화입니다. 이것이 미가서에 나오는 그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과 중동 여러 나라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가 아닌 겁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세계 여러 나라가 못된 의도를 가지고 개입하는 것도 평화가 아닙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휴전 중인 이 한반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제 세계 5위의 군사 대국이 되었습니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온갖 미사일과 전투기가 가득합니다. 2025년 우리나라 국방예산은 61조 2,469억원입니다. 올해 전체 우리나라 예산이 677조에요. 거의 10분의 1일을 국방비로 사용합니다. 미가서의 시선으로 보면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4절 끝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 앉아 있으면 평화가 오겠네요. 아니지요. 그 평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되는 거죠. 그래서 믿는 우리는 이 땅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평화를 이뤄낼 수 있는 겁니다. 평화는 내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타인의 마음에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그 평화로 나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 전하는 그날은 서로의 평화를 이루는 날입니다. 미가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그날의 모습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할렐루야라는 단어를 설명했습니다. 신약 성서에서 유일하게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구절이 나오는 말씀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할까요? 계시록 19장 1절을 보면, “이 일이 있은 뒤에”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네요. 그런데 18장을 봐도 온갖 비유로 된 말씀이라 무엇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지난주 설명드렸잖아요. 계시록은 묵시,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다고요. 1절에서 말하는 “이 일”은 바빌론의 멸망입니다. 백성을 억압하는 이들이 멸망했다고요. 그러니 우리에게는 해방이겠네요. 시련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이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치는 겁니다. 할렐루야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한 번만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1절에도, 3절에도, 4절에도 찬양합니다. 그래서 해방은 평화가 됩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찬양하는 할렐루야는 평화를 찬양하는 노래가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상황이 나오겠네요. 평화를 이뤄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으로 새벽의 집 가족들이 함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할렐루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내 삶에서 나로 인해 타인이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때 ‘할렐루야’를 외치십시오. 그 찬양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 평화를 이루는 과정 중에 내가 조금 손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할 수도 있어요. 왜냐면 평화를 이루는 과정에 내가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과정을 잘 견디어내고, 감내한다면 평화는 그 순간 이루어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삶의 매 순간, ‘할렐루야’의 외침이 우리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마태복음은 24장에 이르러 ‘그날’에 대해 말씀합니다. 마태가 전하는 ‘그날’은 종말의 날입니다. 심판의 날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미가가 바라봤던 예루살렘처럼 탄식만 나오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25장 31절 전에는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 비유’입니다. 두 비유 모두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입니다. 그날 펼쳐질 하늘 나라에 관한 두 비유를 들고 이어서 오늘 본문 31절을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할 수 있겠네요. 누가 그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맞습니다. 오늘 복음서는 누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인지 심사하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날에 두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른쪽 줄, 하나는 왼쪽 줄입니다. 하지만 줄 서 있는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 있습니다. 오른쪽 줄에 서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34-36절입니다. 34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오른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복 받은 사람들이네요. 그날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네요. 구원받는 이유는 35절부터 설명합니다.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었습니다. 나그네를 영접했고, 입을 것을 주었고, 돌보아 주었고, 찾아 주었습니다. 제가 줄 서 있는 이유를 모른다 했지요. 그래서 37절로 39절을 되묻는 겁니다. 우리는 임금님께 그런 일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우리가 그랬나요?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40절입니다. 40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기에서 임금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동일시되어 버리는군요. 무슨 뜻일까요? 최후 심사의 기준은, 최후 심판의 기준은 어려움과 외로움에 빠진 이웃에 대한 자비로운 사랑의 행동이라고요. 미가의 시선으로 풀어드릴까요? 타인의 평화를 이루었는가가 기준이라고요. 그럼 왼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41절부터 눈으로 따라옵니다. 그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입니다. 42절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물도 주지 않았고, 43절 나그네도 영접하지 않았고, 입을 것도 주지 않았고, 찾아 주지 않았습니다. 역시 그들도 영문을 모르고 서 있으니, 질문합니다. 이 이유는 같이 읽습니다. 44절입니다. 44 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44절의 질문의 뉘앙스가 마치 항의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우리가 언제 그랬다고요? 우리는 그런 적 없는 것 같은데요?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45절입니다. 45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음을 교우 여러분은 모두 인정하실 겁니다. 무리는 있어요. 예수님의 삶을 어떻게 한 단어로 표현하겠습니까? 굳이 한 단어로 말하면 사랑이라는 거죠. 예수님의 가르침을 조금 길게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요.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하신 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하신 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경이로운 방식으로 내적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으세요? 그럼 내 주변의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주변 사람을 사랑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됩니다.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기에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서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얻어서가 아니라, 삶의 과정을 보여주시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시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요. 그 과정 가운데 힘든 일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보셨잖아요. 영문도 모르고 서 있었는데 구원받는 사람들요. 작은 것 하나 사랑했기에 받은 구원의 은혜이잖아요. 우리는 그걸 알게 되었잖아요. 사랑하는 은진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서로 사랑해 주십시오. 낯선 이도 사랑해 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아니, 먼저 타인에게 관심을 가져 보세요. 그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놀라운 방식으로 하나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타인도 나도 평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신 진정한 평화 안에서 할렐루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