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렸어? 기도할 수 있어? / ぶったの?祈れる?/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 | 장 본, 나가오 유키 목사 | 2025-08-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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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때렸어? 기도할 수 있어?” ぶったの?祈れる? 성령강림후 아홉째주일 평화통일주일 20250810 마태복음 5:38~48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 모든 참가가 여러분, 함께 예배하는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노회에서 주관하는 21회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 참가자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진행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러분이 많이 보고 들어본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보통 이렇게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 왜? 예수님은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죠.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까요?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주고, 속옷 달라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오 리를 가려거든 십 리를 가줄 정도로 사랑하라고요. 많이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에게 이 말씀에 대해 조금 다른 해석을 해 드리려 합니다. 다른 관점으로 성경을 보자는 거죠. 먼저 은진 교우와 한국 참석자 여러분, 39절을 함께 읽습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1. ‘뺨을 치거든’ 하면 여러분은 어떤 모습을 상상하십니까? 한번 옆에 있는 사람의 오른 빰을 때리는 시늉을 해 봅시다. 진짜 때리지는 마시고요. 오른손잡이는 대략 난감합니다. 왼손으로 때려야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릴 수 있으니까요. 그럼 이번에는 오른손 손등으로 한번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때리는 시늉을 해 보세요. 이제 그림이 그려집니다. 상대의 오른뺨을 때리기 위해서는 오른손잡이는 오른손등으로 때려야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손바닥도 아깝다 이겁니다. 당신은 내 손바닥으로 때릴 가치조차 없다 이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행위가 손등으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40절입니다. 속옷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주라고 하죠. 여러분 옷 몇 벌 입고 있어요? 저만 해도 런닝셔츠, 팬티, 양말 신었고요, 셔츠 입었습니다. 바지도 입었어요.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한참 걸립니다. 그런데 당시 사회는 이런 속옷, 겉옷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보통의 옷은 딱 두벌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속에 입는 속옷과 겉에 입는 겉옷. 속옷은 런닝, 팬츠 이런 것 아닙니다. 그냥 속에 입는 옷 하나, 겉에 입는 옷 하나. 낮엔 엄청 덥죠. 겉옷을 벗고 속옷만 입고 생활합니다. 밤엔 사막지대라서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그래서 겉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즉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말은 내가 상대방 앞에서 발가벗는다는 뜻입니다.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습니다. 41절 한 절 더 봅시다. 5리 가자면 10리 가자고 하래요. 옆에 사람에게 말합니다. ‘오늘 예배 끝나고 같이 가자’ 이런 것 절대 아닙니다. 당시 사회법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부역’이라고 하는데요. 나라에서 국민에게 일정 기간 일을 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군인들이 길을 안내하거나 짐을 옮기는 일을 언제든지 현지 주민들에게 강제로, 아무 때나 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군인이고 유키 목사님이 현지 주민인데 ‘너 이 강대상 들고 신촌역 4번 출구 앞에 좀 갖다 놔. 명령이야!’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이해 가시죠?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제가 유키 목사님에게 강대상 갖다 놓으라고 시켰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신촌역이 아니라 동대문역에 갖다 논겁니다. 이렇게 상황 설정을 하면 이것은 유키 목사님이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닌 거죠. 사랑이 아니라 저항하는 거죠. 다른데 갖다 놨으니까. 명령 불복종이 되는 겁니다. 속옷 좀 벗어달라니까요? ‘어머 옷이 없으신가 봐요. 제 겉옷도 가지세요. 전 다른 옷이 있어요’ 이게 아니라, ‘겉옷도 가져가셔... 이것도 가져가... 가져가려면 다 가져가!’ 이런 겁니다. 오른뺨 때렸어요. 아파요. 그런데 이러는 겁니다. ‘때리셨어요? 이쪽 보시죠? 이왕 때린 거 왼뺨도 때리세요’ 이런 상황인 거죠. 잘못하면 더 맞겠죠. 저항하는 거니까요. 세 상황 모두 어떤 의미가 있냐면요. 저항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주 쉽게 사랑이라고 얘기하죠. 그런데 본문 자체의 상황만 놓고 보면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처절한 저항이에요. 그것도 예수를 쫓아다니던 힘없는 사람들이 당시에 제일 많이 당하던 모욕적인 행위들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왼뺨도 돌려댈 정도로 사랑하래, 줄라면 입고 있는 것까지 다 벗어서 주래, 우리 저기까지 같아가자 이러면 아냐 니네 집까지 함께 갈게.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이 본문은 저항하라고 말하고 있어요. 누구한테요? 너희 힘없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사람들에게요. 이렇게만 말씀을 나누고 끝나면 저는 아마 성서 파괴주의자라고 쫓겨날 겁니다. 저 목사는 주일예배 설교시간, 그것도 일본 참자가도 있는 자리에서 저항하라고 했데, 예수님이 그랬데. 이제 더 중요한 얘깁니다. 조금만 더 집중하세요. 2. 저항하라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요. ‘어떻게 저항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 나오거든요. 아무 말 없이 뺨을 돌려댑니다. 겉옷도 벗어줍니다. 10리도 더 가줍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은 몽둥이를 들고, 창을 들고, 채찍을 들고, 뺨을 때리면서 협박하지요. 뺏어가지요. 그런데 우리가 아무 말 없이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벗어주고, 5리, 10리를 더 가주는 것. 이것은 그들을 당황하게 하지요. 주춤하게 하지요. 그리고는 결국에는 회개하게 하고, 마음을 돌리게 하지요. 말이 되지 않는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다고 그 억압하는 나쁜 놈들이 물러갈 것 같아? 그런데 제가 왜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말하는 줄 아세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거든요. 자신을 욕하고, 때리고 조롱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욕 한 번쯤 하실 수 있었어요. 내가 죽어도, 빌라도 저놈만큼은 죽이고 간다는 심정으로 달려들기라도 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거든요.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에야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 줄 알았잖아요.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선 저항! 그 저항 속에 사랑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것이거든요. 젊고 혈기 왕성한 우리가 생각하면 이해되지 않는 이 비폭력적 사랑. 차라리 내가 죽어도 나도 때리고 싶고, 왜 그러냐고 따지고 싶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44절을 읽어 드립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기독교의 절대 명제! 기독교의 모든 말씀 중 핵심! 이 한마디로 평생을 설교해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단어! 바로 ‘사랑’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것도 이웃을 사랑하라 뿐만 아니라 ‘원수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우리는 그러죠. 다 하겠는데 저 사람만은 안되요.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겠는데 저 사람만은 용납이 안되요. 그런데 비폭력의 저항 다음에 하신 말씀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세리도 한답니다. 당시 제일 미움받던 세금 징수원도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즉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할 수 있는 일 하는데 무슨 상을 바라냐고 합니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끼리 문안하는 것 그게 뭐가 그렇게 대수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배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것, 이것은 당연히 해야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공동체도 다 한다 이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이 안됩니다. 원수와 사랑이라는 단어는 도저히 같이 쓸 수 없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말도 안되는, 도저히 내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안되는 명령을 하십니다. 도대체 어쩌라고요! 마지막 48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해답을 주십니다. 온전하라. 완전하라. 완전한 사람이 되라. 다른 번역 성경에서 이 부분만 따왔습니다. 어렵습니다. perfect한 사람. 그래도 다행입니다. 기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처럼,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 달라. 3. 마무리합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함께 예배하는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 참가자 여러분. 살면서 참 퍽퍽한 일 많이 당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 또한 퍽퍽해집니다. 퍽퍽해진 마음으로 교회와 봐야 그 퍽퍽한 마음으로 보는 교회,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교우들, 다 퍽퍽한 사람뿐입니다. 그런 퍽퍽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도 퍽퍽해 보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마음은 단 하나로 굳어집니다. ‘저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그런데요. 교회는 그런 퍽퍽한 마음을 정화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마음을 정화시켜서 스스로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고,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곳입니다.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처럼 말이죠. 그러려면 주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나의 노력과 하나님의 도우심,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내 마음이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기 위해 우리는 정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옆에 있는 친구, 동료, 선배, 후배, 목회자, 장로, 권사, 집사님들을 보면요, 지금은 조금 모가 나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때렸어? 기도할 수 있어?>입니다.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저 사람이 나 때렸는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냐고 말하는 겁니다.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의 마음이 <나 때렸어? 그래도! 난 널 위해 기도할 수 있어!!>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억압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저항.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진정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0. ウンジン教会の教会員の皆さんたちと、礼拝に参加している日韓青少年合同修養会のすべての参加者の皆さん、一緒に礼拝するすべての方々に神さまにある平和の挨拶をいたします。皆さん、お互いに挨拶しましょう。シャローム、主の平和がありますように。
今日は特別な日です。私たちの教会が属している韓国キリスト教長老会ソウル老会が主管する21回韓日青少年連合修練会参加者たちと共に礼拝する日であるためです。 今日の説教は韓国語と日本語で行います。
今日のお話は、皆さんが何度も聞いたことのある聖書の言葉だと思います。私たちはこのみ言葉についていつもはこう聞いていたと思います。
イエスを信じる人々は隣人を愛し、敵を許さなければならない。どうして?イエス様は会ったこともない私たち皆の罪を許したからです。 では、どの程度まで許して愛するべきでしょうか?右の頬を叩けば左の頬も打たせてあげて、下着がほしいなら上着まで脱いであげて、五里を行くなら十里行ってあげるほど愛しなさいと。
何度も聞いてきた話です。でも、今日はこの言葉について少し違った解釈をしてみたい思います。違う観点で聖書を見てみようということです。 まず、ウンジン教会の皆さんと韓国の参加者の皆さん、39節を一緒に読みます。
39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悪人に手向かってはならない。だれかが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なら、左の頬をも向けなさい。
1. 「頬を打つ」と言ったら、 皆さんはどんな姿を想像しますか? 一度、隣にいる人の右のほうを叩くふりをしてみましょう。 本当に叩かないでください。右利きの人はだいたい困ります。左手で叩くから相手の右頬を叩くことができますから。
では、今度は右手の手の甲で一度相手の右頬を叩く真似をしてみてください。これならできますよね。相手の右頬を叩くためには、右利きは右手の甲で叩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これは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手のひらを使うのももった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あなたは私の平手打ちに値しないということです。 当時、イスラエル社会で最も侮辱的な行為が手の甲で叩くことでした。
40節を読みます。下着を取ろうとする人には上着まであげなさいと言います。皆さん、服を何着着ていますか?私もランニングシャツ、パンツ、靴下を履いて、シャツを着ています。ズボンもはきました。新しい服に着替えるにはかなりかかります。
ところが、当時の社会はこんな下着、上着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の当時、普通の服2着だけでした。文字通り、中に着る下着と外に着る上着。下着はランニング、パンツなどではありません。ただ中に着る服一つ、外に着る服一つ。昼間はすごく暑いですよね。上着を脱いで下着だけ着て生活しています。夜は砂漠地帯なので気温がぐっと下がります。だから上着を着なければなりません。つまり、上着まで脱いでくれというのは、私が相手の前で裸になるという意味です。侮辱中の侮辱ですよね。
41節をもう一度見てみましょう。5里行こうとしたら10里行こうと言いなさいって。隣の人に言います。「今日、礼拝が終わってから一緒にどっか行こう」こういう訳ではありません。 当時の社会法にこんなものがあります。 「賦役(ぶえき)」と言うんですけれども。国で国民に一定期間仕事をさせるのです。
ところが当時、イスラエル社会は道を案内したり、荷物を運んだりすることをローマの兵隊たちがいつでも現地の住民たちに強制的に、いつでもさせることができました。 言い換えると、私が兵隊で、ユキ牧師が現地の住民なんですが、「お前、この講壇を持って新村駅の4番出口の前にちょっと置け、命令だ!」と言うシチュエーションです。理解できますよね? 重要なのはこれからです。私がユキ牧師に講壇を置くようにさせました。すると牧師が新村駅ではなくさらに遠い東大門の駅まで持ってきて置いたのです。このように状況設定をすると、これはユキ牧師が私を愛し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愛ではなく抵抗しているんです。命令されたのとは違うのところに置いておいたわけです。つまり命令に背いているんですよね。
下着を脱いでくださいって? 「あれ、服がないみたいですね。私の上着も持ってください。 私は他の服もありますから」というのではなくて、 「上着も持って行って…これも持って行って···持っていくならもう全部持ってけ!」ということです。
右の頬を叩きました。痛いです。でも、こう言うんです。叩きましたね?こっちもありますよ。どうせ叩いたんだから、左の頬も叩いてくださいっていう状況なんですよね。下手したらもっと叩かれるでしょう。相手に抵抗してるわけですから。
この3つの状況にどんな意味があるかと言うと、抵抗の意味があるのです。私たちはこの話は愛だって簡単に言っちゃうんですが、みことば自体の状況だけを見れば、これは決して愛ではありません。凄絶な抵抗なんです。しかもイエスについて行った力のない人々が、当時一番多く受けた侮辱的な行為を例に挙げて話しているんです。
私たちはこの聖書の箇所をただ何も考えずに、左の頬を向けるほど愛するんだ、あげるなら着ているもの全部脱いであげるんだ、あそこまで一緒に行こうって言ったら、いやいや、あなたの家まで一緒に行ってあげるよ、そういう話だと理解しているのです。でも、そうじゃないんです。この聖書の話は、抵抗しなさいと言っています。誰にですか?あなたたちのような力のない人たちを押さえつける人たちにです。
こんなふうに話をして説教を終えたら、私はおそらく聖書破壊主義者だと教会から追い出されてしまいます。あの牧師は、日曜礼拝の説教の時間、それも日本の参加者がいる席で抵抗しろと言ったそうだ、イエス様がそう言ったって言ってるよ。これからもっと重要な話をします。もう少しだけ聞いてしてください。
2. 抵抗しろ、というのは合っています。ところがですね。「どのように抵抗するのか?」というのが問題なんです。ここから愛が出てくるんですね。
何も言わずに頬を向けます。上着も脱いであげす。10里でも歩いてあげます。抑圧する人々は棒を持って、槍を持って、鞭を持って、頬を叩きながら脅迫します。奪っていきます。ところが、私たちが何も言わずに頬を向けて、上着をあげて、5里、10里、さらに行ってあげること。 これはかれらを当惑させるんです。うろたえさせるんですね。そして結局は悔い改めさせて、心を変えさせるんです。お話にならない、論理の飛躍だ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そうやったところで、その抑圧する悪い奴らが改心すると思うの?
ところで、私がなぜかれらが悔い改めると確信しているのか分かりますか?イエス様こそが、そんなふうに生きて、十字架で死んだからです。自分を罵って、殴って、からかった人々に、イエス様だって一回くらいは罵り返したってよかったはずです。自分が死ぬとしても、自分に死刑宣告をしたピラト、あいつだけは道連れにしてやる!というような気持ちで走っていって殴りつけるみたいなことだってできたはずなんです。
でもイエス様はそうしなかったんですね。 イエス様が死んだ後なってようやく、人々はイエスが誰なのか分かったんですよね。暴力に非暴力で立ち向かう抵抗!その抵抗の中に、愛のメッセージが隠れているのです。
若くて血気盛んな私たちが考えると理解できない、この非暴力の愛。むしろどうせ自分が死ぬなら相手を殴ってやりたいと思ったり、お前はなんでこんなことするんだと相手を問い詰めたくなる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書の言葉です。44節を読みます。
44 しかし、わたしは言っておく。敵を愛し、自分を迫害する者のために祈りなさい。 キリスト教の絶対的なテーマ!キリスト教のすべての言葉の中の核心!この一言で一生を説教したとしても、その深さが分からない単語!つまり「愛」が、この部分に出てきます。
しかも隣人を愛せというだけでなく、「敵も愛せ」と言うんです。私たち人間は、だいたいこういう感じじゃないでしょうか。全部OKだけど、あの人だけはだめです。私はなんでも言われた通りにやるけど、でもあの人だけは許せません。ところが、非暴力の抵抗ということのすぐ次にイエス様が言った言葉が、この「敵を愛せよ」という言葉なんです。
自分のことを愛してくれる人を愛することは、徴税人でもするんだと聖書に出てきます。 当時、一番嫌われていたし徴税人(税金を集める人)でもできることだってことです。つまり猫も杓子も、誰だってできるのです。できることをするのに、何の見返りを求め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それは当然、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です。 仲のいい人たちの間だけで挨拶しあうこと、それの何がそんなに褒められるようなことなのかとイエスさまは言います。この礼拝の中でお互いに愛を分かち合うこと、これは当然やるべきことだ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他の人たちもみんなやってることだと言うことです。
敵を愛しなさい!訳が分かりません。敵と愛という言葉は到底一緒になんて使えない言葉です。ところが、その訳の分からない、到底私の人間的な心ではできない命令をイエスさまはするんです。そんなの、一体どうしたらいいんだよ!
最後の48節です。一緒に読みましょう。
48だから、あなたがたの天の父が完全であられ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完全な者となりなさい。 イエスさまは答えを教えてくれます。完全であれ。完璧でなれ。完全な人になれ。難しいですね。perfectな人。めちゃくちゃ難しいけど、その中でも助かるのは、基準が示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天にいる神さまのように、そんな人になってほしい。
まとめます。
ウンジン教会の皆さん、そして一緒に礼拝している日韓青少年合同修養会参加者の皆さん。 生きていく中で、本当にうまくいかないときがいっぱいあります。そうするうちに、自分のの心の中もうまくいかなくなってきます。うまくいかない心で教会に来ても、そのうまくいかない心で見る教会、牧師や教会の人たち、みんなうまくいかない感じに見えてきます。そんなうまくいかない気持ちで世の中を見ると、世の中もうまくいかないように見えます。そんな気持ちでお互いを見つめ合うと、心は一つの思いに凝り固まってしまいます。「あいつらが悪いんだ!」
だけれども、教会はそんなうまくいかない心を浄化できる場所です。その心を浄化させて自ら完全になり、完璧になり、パーフェクトな人になろうと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です。完全で完璧な神さまのようにです。そのためには神さまの助けが、絶対的に必要なんですね。
自分の努力と神さまの助け、聖霊の導きで私の心が完全になり、完璧になるために、私たちは本当に心から祈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のような気持ちでそばにいる友人、同僚、先輩、後輩、牧師、教会の人たちを見ると、今はまだ少しイラっとするようなところもあっても、だんだんそれさえも愛すべき部分として見えてきます。
今日の説教のタイトルが「ぶったの?祈れる?」です。象徴的な意味です。あの人が私を叩いたのに、その人のために祈ることができるのかと言うのです。今この時間から、皆さんの心が「私を叩いたの?でも!私はあなたのために祈れるよ!!」こうなることを願っています。
抑圧するのとは全く違う方式の抵抗。これは抵抗ではなく、真のイエス様の愛です。皆さんのことを、主の名によって愛しています。お祈りし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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