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말씀선포

  • 홈 >
  • 예배와 말씀 >
  • 이 주의 말씀선포
이 주의 말씀선포
거울에만 비추지 마세요 /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장 본 목사 2025-08-24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4

http://eunjin.onmam.com/bbs/bbsView/101/6554604

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거울에만 비추지 마세요.

 

성령강림후 열한째주일

20250824

 

누가복음 4:16-30

16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17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22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내게다 끌어대면서, ‘우리가 들은 대로 당신이 가버나움에서 했다는 모든 일을, 여기 당신의 고향에서도 해보시오하고 말하려고 한다.”

24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무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만,

26 하나님이 엘리야를 그 많은 과부 가운데서 다른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시돈에 있는 사렙다 마을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서 아무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28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서, 모두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0.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시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그리스 신화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리려 합니다. 우리나라 옛 동화를 전래동화라고 하죠? 여러분도 그리스의 전래동화 한 편 듣는다 생각하시고 잘 들어보세요. 이야기는 제가 각색해서 전해 드립니다.

 

한 청소년이 있었어요. 나이는 16. 그런데 너무 예쁘게 생겼어요. 얼마나 예쁘게 생겼냐면 보는 사람마다 이 소년에게 홀딱 반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소년에게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아요. 모두 거절하지요.

 

그런데 어떤 이에게 거절하면서 마음의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소년에게 거절을 당한 이는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는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면서 신에게 부탁하죠. ‘내가 받은 고통만큼, 그 소년도 고통받게 해 주세요.’ 이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소년은 어느 날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 얼굴에 반해 버립니다. 얼굴을 들면 자꾸 물에 비친 그 얼굴이 생각나서 미칠 것 같습니다. 또 봅니다. 자꾸 비춰 봅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물에 비친 얼굴에 키스를 하려고 몸을 구부리는 순간,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렇게 이 소년은 죽습니다.

 

아마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일 거예요. 그 소년의 이름은 나르키소스입니다. 그를 짝사랑하다 죽은 이는 에코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요. 에코가 복수를 부탁한 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복수의 신 네메시스입니다.

 

나르키소스하면 잘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 알죠. 나르시스. 요즘은 그 이름으로 유래한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가 더 유명하죠. ‘나르시시즘은 정신분석학에 나오는 학명입니다. 자신의 외모, 능력을 지나치게 뛰어나다고 믿거나 사랑하는 자기 중심성 성격 또는 잘난체하는 행동을 뜻할 때 사용합니다.

 

나르키소스가 빠져 죽은 물에서 꽃이 피었대요. 그 꽃 이름이 수선화랍니다. 그래서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사랑, 자아도취랍니다.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내 외모가 보였잖아요. 거기에 반하니까 결국 죽음에 이르렀어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른들을 위한 말씀으로 이어가니까, 오늘은 어린이-청소년 여러분도 끝까지 힘내서 한 번 들어보세요.

 

 

1.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나요? 여러분의 삶에는 지난 한 주, 어떤 일들이 있었습니까? 분주했던 분들은 바쁘게 달려온 수고대로, 또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분들은 새로운 일상의 시작으로 그리고 새로운 일들을 준비하는 마음에는, 펼쳐질 일정 위에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직까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후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계시지요? 성령님께서 행하신 일들, 또 앞으로 하실 일들을 통해 우리 내면이 성화, 거룩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절기, 성화의 계절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참 불안합니다. 마치 게임을 하듯이, 힘과 힘으로 맞붙고 있는 국제 관계와 또 이를 어떻게든 자기들의 유리한 대로 사용하려고, 지켜보는 주변 나라들, 또 모든 가치를 물질적 이익으로 계산해버리는 세상을 뼈아프게 발견하는 요즘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평화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2주 전 저와 우리 교회가 함께 섬겼던 한일청소년연합수련회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평화였습니다. 그 수련회에서 저는 주제강연을 하면서 청소년들에게 평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평화는 나의 마음이 평안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당신으로 인해 내 마음이 평안한 것이 진정한 평화라고요. 한국과 일본은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관계이지만, 궁극적으로 한국이 살아야 일본도 산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이 죽으면 한국도 죽는다고 했어요. 평화는 서로 평안해야 하는 겁니다.

 

, 이제까지 두 이야기를 드렸지요. 나르시스 이야기, 평화 이야기. 두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복음서로 말씀 여행을 떠납니다.

 

 

2.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고향 나사렛에 이릅니다.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지요. 통상적으로 회당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를 드리고, 신앙고백문을 암송한 후에, 율법이나 예언서 말씀 중 한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낭독하신 예언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 18절과 19절입니다.

18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19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당시 나사렛 사람들은 거의 가난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성전세, 십일조, 첫 열매 제물 등의 종교세를 내고 소금세, 판매세 등의 간접세를 내고 또 통행세를 포함한 관세를 냅니다. 이렇게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도 손에 쥔 것은 부스러기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신 이 이사야서 말씀은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을 겁니다. 회당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들의 현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그들에게,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해는, ‘희년을 말합니다.

 

 

3.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 맞이하는 거룩한 해입니다. 7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 50이 되는 해입니다.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면서 시작되는 희년에는 빚으로 인해 남에게 넘어갔던 땅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갑니다. 종으로 팔렸던 사람들의 신분도 회복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갑니다. 빚은 탕감되고 땅도, 종도, 짐승도 모두 안식하는 해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희년이 되는 날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주님의 영, 성령이 내리신 이유가 희년을 회복하기 위함이라 말씀하신 겁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기대했을까요? 내 땅을 찾겠구나. 내 신분을 되찾겠구나. 혹은 우리나라가 로마 식민지에서 해방되려나 보다 등등요.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읽으시고 두루마리를 말아서 맡은 자에게 돌려주시고는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어서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나사렛 회당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는 바를 마음에 품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희년은 먼 미래의 어느 날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감탄했고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습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모든 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과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와의 만남 자체가 희년의 구현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 죄와 가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풀어주셨고,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과도 같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 삶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셨습니다.

 

정치적인 억압과 부당한 경제구조로 인해 피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셨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의 삶은 회복되었습니다. 중풍병, 죄인 취급 받던 사람도 나았고, 여러 고민과 염려, 불안, 귀신은 쫓겨났으며, 낙심했던 영혼에 생명력이 살아났습니다. 예수로 인해 이미 희년이 시작된 것입니다.

 

4. 그렇다면 희년,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회복하여, 평화 이루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설교에서 나르시스 이야기를 전해 드렸지요. 자신의 외모를 보고 반한 그는 결국 죽음에 이르렀지요. 그 이야기 드린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거울에만 비추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비추어 보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비춘다는 것은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성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평화를 이뤄주십시오. 그 평화가 나를 죽음이 아닌 생명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평화에 이르는 두 번째 길. 나의 모습을 하늘에 비추어 보십시오. 신앙인은 우리의 얼굴을,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 비추어 보아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우리의 생활과 언어습관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바로 알게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의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거울만 보면 나만 보입니다.

 

예수라는 사람을 물에 비추어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거울에 비추면 누가 보였을까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예수. 남자에,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는 유대인, 직업은 비정규직 목수. 물에 비추어 본, 거울에 비춰 본 예수의 겉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비추어 본,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성령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하시는 아들입니다. 신비로운 존재이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희년, 은혜의 해를 선포할 사명을 안고 오신 거룩한 존재입니다.

 

 

5.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떤 거울로 비추어 보아야 하는가 말입니다. 우리도 나의 얼굴을 물에만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하늘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따라 물에 빠져버린 나르시스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우리 존재를 물속에 비추어 놓고 여러 모양으로 규정하려 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하늘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돈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취업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성별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사는 집 평수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 또 뭐가 있을까요? 연봉에? 연금에? 그도 아니면 목사, 장로, 권사라는 직분에? 그런 것들에 비추어 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모습을 무엇에 비추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생명을 비추어 보는 거울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한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가 희년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토록 귀한 존재라는 사실, 우리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 이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우리의 얼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귀한 존재이니 우리가 자고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이미 희년을 맞았으니, 희년을 펼쳐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늘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하늘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희년을 선포하러 오신 주님의 삶을, 우리도 따라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우리도 물속에서 올라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평화로 감싸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하늘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존중하며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여러분 자신과 평화 이루고, 이웃을 향하여 평화를 이루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는, 은혜의 날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이끄심을 따라... / 성령강림후 열두째주일 사진 장 본 목사 2025.08.31 0 17
다음글 The Covenant / 성령강림후 열째주일 사진 장 본 목사 2025.08.17 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