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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주님 안에 죽음이라 / 창조절 열째주일 장 본 목사 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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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주님 안에 죽음이라

 

창조절 열째주일

20251109

 

요한계시록 14:13

13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2-17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1.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아끼던 대학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그 사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뛰어듭니다. 기자가 되어 정신없이 바쁘게 세상을 살아갑니다.

 

유명해졌고, 돈도 꽤 벌었습니다. 어느 날 TV를 보는데 자신의 대학 시절 그 교수님이 나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모습은 루게릭병을 앓으며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16년 만에 보는 교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졸업하면서 자신이 교수님께 연락드리겠노라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자책합니다. 이내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매주 화요일마다 교수님을 찾아 병간호를 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병간호, 그런데 그 교수님은 매주 화요일 찾아오는 제자에게 멋진 인생 공부, 삶에 대한 세미나를 합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는 책의 간단한 줄거리입니다. 모리는 교수님 이름이고, 제자는 미치라는 사람입니다. 미치가 그 화요일의 시간을 책으로 냈지요.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모리 교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죽게 되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아무도 믿질 않는단 말야. 만약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텐데...”

 

이런 구절도 있어요. “미치, 어떻게 죽어야 할지 배우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울 수 있어. 다시 말하면 일단 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된다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교수님의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사랑이란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대로 살아 있기 위한 방법이라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

 

목사님은 지금 여러분에게 죽음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거랍니다. 죽음에 대해, 죽음을 앞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살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배우는 중입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살아 있을 때, 많이 사랑하세요. 부모님도, 친구도,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도요. 왜냐고요? 모리 교수님이 그러셨거든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할 거야라고요. 사랑은 죽음도 막지 못하는 영원함이거든요.

 

끊임없이, 원없이, 한없이 사랑할 줄 아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죽음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음에 대한 꿈도 자주 꿉니다. 뭐 이런 꿈입니다.

 

제가 죽어요. 그런데 죽은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제가 바라보고 있는 거죠. 저만 죽는게 아닙니다. 어느 날 꿈엔 제 아내도 죽습니다. 심지어 딸래미도 죽어요. 꿈에서 말이죠. 여러분이 이런 꿈에서 깨면, ‘무슨 개꿈을 꾸고 그래!’라며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전 그 꿈들이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마치 제 인생의, 제 삶의 미래를 리허설하는 것처럼 보여요.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 중 하나의 주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서신서로 말씀여행을 떠납니다.

 

오늘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죽음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아마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한 번 정도 깊이 고민해 보신 적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경험해 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자들은 죽음에 대해 말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습니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이자 하나님의 생명법칙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죽게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변하지 않는 생명법칙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는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살아있다는 것, 살고자 함은 참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에, 그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저 불쌍한 인생의 단면을 느낄 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법칙, 명령을 어겼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칙, 명령을 어겼기에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반드시 죄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로, 또는 고난으로 나타나지요.

 

모든 생명은 죽는다!’라는 이 생명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인간이 이 생명법칙을 거스르게 된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일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법칙을 많이 어기면서 살아왔습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생명법칙과 하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입니다. 죄에는 분명 그 죄값을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세상 많은 곳에서 생명이 아파하는 모습, 신음하는 모습들이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법칙을 어긴 죄에 대한 무거운 대가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 인간은 다른 생명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죄를 짓고 살아온 것이지요.

 

죽음.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들, 그런데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죽음을 대합니다.

 

 

3. 첫 번째는 죽음 = The End’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은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또 한 유형의 사람들은 죽음 = (Re)Start,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을 내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로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의 경향을 보면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높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많아요. 왜 그럴까요? 죽음이 내 인생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내 인생의 목표를 방해하는 요소일 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내 인생에서 죽음을 제거하고 싶어 하고, 두려워합니다.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죽는 것을 또 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조차도 내 삶의 일부로 인정합니다. 하여 지금은 내가 살고 있지만 언젠가 죽게 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적 의지 때문에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단 하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던 사람들은 왜 죽음을 불사할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오늘 계시록에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3절입니다.

 

13 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 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기록하여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한 번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어서 또다시 확증까지 해주십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해 죽는다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아닙니다.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할 수 있는 이유! 바로 주님 안에서 죽음은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부연하죠.

 

주님 안에서’. 이 말은 나의 신앙고백이자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나는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나약한 나를, 힘없는 우리를 주님 안에서강하게 만들어 냅니다. 로마의 황제가 믿는 자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내가 주님 안에서거하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그들과 맞설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설명할게요. ‘주님 안에서’. 말만 들어도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하고 따뜻한 이 표현과 죽는다라는 부정의 극치를 달리는 두 단어가 만난 주님 안에서 죽는다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려울 것 같지만 아주 쉽습니다. 13절 중간 그러자부터 다시 한번 읽습니다.

 

13b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바로 이라고 계시록은 말합니다. ‘이 험한 세상, 열심히 살아온 당신! 이제 조금 쉬어라.’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말씀이 이어서 바로 나옵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은 쉬는 것 맞는데, 주님 안에서 죽음이 쉼이 될 수 있는 이유가 13절의 마지막 그들이 행한 일이 그들을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쉽게 풀어드리면 살아생전 행위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우리를 변호해 준다는 말입니다.

 

나의 죽음이 주님 안에서 쉼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살아생전 우리의 고백과 삶이 우리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닌 삶의 태도와 나의 고백이 주님을 향해 훗날 우리 자신을 변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말한들 제가 여러분에게 주님 안에서 죽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할 때 아멘!’하실 분은 없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 저조차도 제 자식 키우고 있으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고 싶을 것 같고, 이왕이면 결혼하는 모습도 보고 싶을 것 같고, 내 자식이 낳은 자식도 보고 죽고 싶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 죽고 싶지 않아!’ 이 말이 나 죽고 싶어요!’라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거할 수 있게만 된다면, 지금까지 죽음을 통해서 절망만을 바라보았지만, 복을 바랄 수 있고 죽음을 바라보며 쉼을 느끼며, 죽음을 바라보며 절망이 아닌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이 쓰였던 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은 오직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죽은 거예요. 그 신앙의 선조들로 인해 우리는 이런 자유로운 시대에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좋은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께 오늘, 부탁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 안에거하고 있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면 마지막 때에 우리의 행한 일들이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삶 가운데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우리가 삶 가운데 주님 안에서거할 수 있는 명확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친구 있으세요? 스승 말고요. 부모, 친척 말고요. 친구요.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 곁에 몇 명이나 있나요? 어떤 친구일까요? 학교 동창일 수도 있겠지요. 교회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어요.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일 수도 있겠네요. 친구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친구(親舊). 친할 친 자에 옛 구 자를 써서 친구입니다. 오래도록 친한 사람. 옛날부터 친한 사람. 요즘은 누구에게나 친구라고 하는 것 같아요. 요즘 학교폭력 사건이 많지요. 이렇게 변명하죠. ‘친구라서 장난친 거예요.’ 아주 부적절한 표현이지요.

 

친구는 그럴 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친구가 된다는 건, 오래도록 그 사람 기억 속에 남아서,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입니다. 함부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거죠.

 

이런 광고 문구 자주 봅니다. ‘우리 기업은 당신의 친구입니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 대로라면 회사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친구란 나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란 기업의 이윤창출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친구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드라마를 보면 이런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극에서 주인과 종이 있는데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한다는 이야기죠. 종의 신분으로 넘볼 수 없는 주인의 신분을 망각한 채,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어쩌고... 이런 장면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치고 이루어지는 사랑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종은 종이고 주인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일에 종이 끼어드는 법은 없습니다. 종은 자신의 일을 할 뿐입니다. 주인은 자신이 하는 일과 생각을 일일이 종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종과 주인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 요한복음 1515절입니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라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내가 너의 친구라면 그리고 진정한 친구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좋은 것이 있다면 친구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려주고 싶어지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내가 당신의 친구라면 내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의 슬픈 일, 힘든 일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친구라면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 가운데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말씀하십니다. 친구니까 주인이 종에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 아니라, 다 알려 주겠다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것이 엄청난 진리이기에 내 친구인 당신들에게 알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일까요? 12절부터 14절의 말씀입니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14절 마지막 나의 친구예수님의 친구가 되기 위한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말 한대로만 하면 그러면 친구가 된다는 거죠. 그 말, 다른 것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복음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모 아니면 도의 신학이라고 거칠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애매모호한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빛이 아니면 어둠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이지, 사랑했다 미워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니면 바로 미움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서 요한 선지자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라.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만 알 수 있다면, 내가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야 할지 모른 척하는 사이가 되어도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입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세상에서는 내가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친해질 수 있지요. 내 선택이니까 가능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친구되는 것은 좀 다릅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좋습니다, 예수님! 제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드리죠!’라고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건 예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신 결과라는 것이고, 그 결과 내가 세상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고,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이루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것의 참 뜻이라는 거죠.

 

그러니 내가 예수님께 이만큼 해 드렸으니 예수님도 나에게 이만큼 해주쇼!’라고 거래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요즘 믿는 사람들을 보면요. 예배에 나오고,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는 것을 무슨 벼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어깨 힘주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이 더위, 이 추위에 내가 교회를 나왔어.’ ‘내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왔다고!’ ‘나 이런 상황에서도 봉사하고 있어!’... 이렇게 말하면서 말이죠. 그런데요.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시간이 나서 예배에 나오고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는 것 아니라고요.

 

주님께서 나를 택하시지 않았더라면, 이 험한 세상에서 무슨 꼴을 하고 살았을지 모르는 나라고요. 나에게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께... 하나님께... 그렇게 거래를 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아니, 거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거라고요. 왜냐고요? ‘친구니까요.

 

친구한테, 진짜 친구한테 3년 전에 꿔간 돈 10만 원 갚으라고 안 하잖아요? 학창시절에 맨날 내가 떡볶이 샀으니까 이제는 니가 밥사 이렇게 말 안 하잖아요? 친구니까 내가 백 번을 밥을 사도 아깝지 않잖아요? 친구는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결론 또한 사랑입니다. 마지막 17절입니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해야 예수님의 친구인데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서도 사랑해야 되는 군요. 사랑해서 친구가 되었다고 그만 사랑하는 것 아니라 친구가 돼서도 사랑해야 하는 군요. 죽으나 사나 사랑이군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군요.

 

 

5. 말씀을 정리합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로 시작한 오늘 말씀은 사랑으로 막이 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죽음이 사랑으로 옮겨가게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사랑이 주님 안에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 바로 내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생명의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이가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님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살아가는 동안 진실한 친구 만들어 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진정한 친구는 여러분 얼굴에 처음 보는 미소를 남겨줄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을 친구로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친구가 된다는 말, 나를 선택하신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도 그 사랑 베풀겠노라고 다짐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제 2025년도 7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 나의 사랑을 하나님께, 예수님께, 내 가족에게,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에게 고백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영원히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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