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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 앞에서 / 창조절 열한째주일 / 추수감사주일 | 장 본 목사 | 2025-11-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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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주님 앞에서 창조절 열한째주일 추수감사주일 20251116 시편 116:1-14 1 주님,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기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2 나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니, 내가 평생토록 기도하겠습니다. 3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엄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나를 덮쳐 올 때에, 4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간구합니다. 이 목숨을 구하여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5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6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7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8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9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10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11 나는 한 때, 몹시 두려워,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12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14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루겠습니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과 여러분을 위한 말씀을 합하여 전해 드립니다.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추수감사주일을 맞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열매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임을 다시금 새기는 절기입니다. 땅에 직접 파종하고, 곡식을 추수한다면 오늘의 감격이 더 클 텐데 도시에서 허겁지겁 살아가는 우리에게, 추수감사절기는 때로 생경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파종을 생각해 보면 살아온 날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직면한 현실 외에 다른 것들은 보지 못할 테니까요. 사실 우리의 시대는 참 어렵습니다. 웃는 날도 있지만, 걱정하는 날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어디 무기로만 싸우는 것이 전쟁인가요? 무역으로 인한 전쟁과 맞먹는 갈등은 더 심화하고 있지요. 우리 사회만 봐도 어려운 시간의 연속입니다. 계엄을 하지 않나, 정권이 바뀌었어도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은 쉽게 진도가 나가질 않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도 한가득 입니다. 신천지, 통일교, JMS 등 온갖 이단 앞에 교회가 올곧게 서가기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회사에서, 어떤 분은 가게에서, 여러 삶의 자리에서 쉽게 살아가는 분 없습니다. 교회는 어떤가요? 주일마다 뵙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면 목사는 참 행복합니다. 그러다가도 우리 교회의 지속 가능성을 생각할 때마다 목사는 저절로 주님 앞에 무릎이 꿇립니다.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추수감사주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가 있습니다. 삶은 고통이 없기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어둠 속에서도 등불 하나 비출 수 있기에 감사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감사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덮여 있던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일상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온 땅이 어둡던 1942년 2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이 몰래 다니던 기도처 옆의 우물을 바라봅니다. 들여다보니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은 개구리 사체들이 많이 있었지요. 이 사람, 개구리의 처지가 식민지배를 받는 우리 민족 같아서 마음이 짠해 집니다. 그래서 죽은 개구리를 건져 땅에 묻어주고, 행여나 살아있는 건 없나 해서 유심히 우물을 바라봅니다. 놀랍게도 그 추위에 살아있는 개구리 몇 마리를 발견합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며 이 사람 희망을 봅니다. 실낱같은 희망입니다. ‘다 죽진 않았구나. 살아있던 친구들이 있었구나.’ 이 사람, 일제 강점기 시대 <성서 조선>이라는 신앙지를 발간한 김교신 선생님입니다.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으니 다행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추우니 움직임이 둔할 수는 있겠네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살아 있으니 괜찮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찬 바람 부는 현실에서 우리가 다소 둔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살아 있습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또 희망 품고 일어나면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시인은 고난 중에 신음합니다.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3절, 8절, 15절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을 볼 때 굉장히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3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얽어 매고, 스올의 고통이 나를 엄습하여서, 고난과 고통이 나를 덮쳐 올 때에, 4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 간구합니다. 이 목숨을 구하여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때론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 순간 있지요? 그럴 때도 주님은 우리의 신음을 기도로 들으시는 분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방 여인 하갈의 신음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애굽의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던 히브리 백성들의 탄식을 들으셔서 출애굽을 이루셨고 배고픈 광야 생활, 일상의 호소를 들으시고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신음을, 고단함을, 아픔을, 막막함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시인은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라 합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 주님은 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6 주님은 순박한 사람을 지켜 주신다. 내가 가련하게 되었을 때에, 나를 구원하여 주셨다. 순박한 사람이란 소박한 사람을 일컬음이 아닙니다.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절박한 형편의 사람입니다. 주님의 눈은 광야 한복판의 하갈처럼, 애굽의 억압 아래 히브리 민족처럼, 주님 외에 의지할 데 없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탄식들을 향하고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한숨은 그저 절망에 매몰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지켜 주시기에, 주님이 구원하여 주시기에 주님 앞에 토로하는 소리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새로운 삶의 소망이 될 수 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시인은 기도에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의 영혼을 짓누르던 큰 무거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문제 자체가 해결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고난으로 인해 캄캄하던 그의 마음에 불이 밝혀졌다는 사실입니다. 7절입니다.
7 내 영혼아,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셨으니 너는 마음을 편히 가져라. 주님이 너를 너그럽게 대해 주신다. 즉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니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얘깁니다. 평안함,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말씀을 계속 이어 봅니다. 8절과 9절입니다. 8 주님, 주님께서 내 영혼을 죽음에서 건져 주시고, 내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시고,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하여 주셨으니, 9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현실의 무거움이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는 무기력, 무의미, 무책임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을 한껏 살아내지 못합니다. 될 대로 되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냉소주의자가 되거나, 비관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리에 머물지 말자고 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그런 무기력에서 건져 주겠다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낙심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새역사를 써 갈 책임있는 주체로 세우실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내 발이 비틀거리지 않게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실족하게 하는 걸림돌들이 많습니다. 자꾸 비틀거리고 넘어지다 보면 무릎에 멍이 들고, 이마도 깨집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인 괴로움입니다. 넘어짐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자신감을 잃게 마련입니다. 더 깊어지면 좌절하고, 좌절에 빠진 사람은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도 든든히 세우겠다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환난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왜냐면, ‘환난은 인내력을,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 믿기 때문’입니다. 고단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그 길을 걸으며 우리를 꼭 붙잡고 계십니다. 5.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알았기에 10절에서 고백합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할 때에도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견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다짐하지요. 이렇게 말입니다. 9절입니다. 9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 ‘살겠다’ 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뒤로 숨지 않겠다는 겁니다. 힘들면 힘든 대로, 평탄하면 평탄한대로 여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역경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그 역경을, 하나님을 향해 이끄는 바람으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바다 위에 큰 바람이 일면 배를 운전하는 데는 애를 먹겠지만, 그 바람은 배를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게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는 바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다가가게 하는 그런 바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지금, 어떤 말씀을 드리고 있나요? 괜찮다고요. 다 괜찮다고요. 살자고요. 괜찮으니 살아가자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우리의 신앙을 담아 함께 다짐하며 읽습니다. 12절부터 14절입니다. 12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14 주님께 서원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루겠습니다. 우리 손에는 어떤 잔이 들려 있습니까? 잔을 드는 건 우리 자신입니다. 구원의 잔을 드시겠습니까? 원망의 잔을 드시겠습니까? 감사의 잔을 드시겠습니까? 실망의 잔을 드시겠습니까? 그런 삶의 기로에서 주님께 12절처럼 물으십시오. 신앙인은 어려울 때 주님께 묻는 사람입니다. 물을 수 있다는 건, 나의 삶을 은혜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구원과 원망의 잔에서, 감사와 실망의 잔에서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6. 지난주 우리는 죽음을 사랑으로 변화하게 하신 예수님의 삶을 보았고, 오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음도 사랑으로 사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오늘 시인도 죽음 앞에 놓일 정도로 절박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 절박함을 주님을 향한 구원과 감사로 환원하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 앞에 절망이 있다면, 오늘부터 소망으로 바꾸어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원망이 있다면 오늘부터 사랑으로 다시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 삶이 구원의 잔, 감사의 잔을 드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으로 보답합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읍시다. 그렇게 그저 사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것을 믿고, 그분의 뜻을 반드시 펼쳐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주님께 속한 생명은 죽어도 죽지 않으며 주님은 가장 연약해 보이는 것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신다는 진리가 우리 삶에서 증언되기를 소망합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 감사로 맞이하는 추수감사절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갚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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