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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한 대로... / 창조절 열두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11-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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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그가 한 대로... 창조절 열두째주일 20251123 열왕기하 17:6-14 6 드디어 호세아 제 구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 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7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집트 왕 바로의 손아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며, 8 또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면전에서 내쫓으신 이방 나라들의 관습과,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잘못한 것을, 그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9 이스라엘 자손은 또한 주님이신 그들의 하나님을 거역하여 옳지 못한 일을 저질렀다. 곧, 망대로부터 요새화된 성읍에 이르기까지, 온 성읍 안에 그들 스스로 산당을 세웠으며, 10 또 높은 언덕과 푸른 나무 아래에는 어느 곳에나 돌기둥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세웠으며, 11 주님께서 그들의 면전에서 내쫓으신 이방 나라들처럼, 모든 산당에서 분향을 하여 주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악한 일을 하였으며, 12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우상숭배를 하였다. 13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여러 예언자와 선견자를 보내어서 충고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그 악한 길에서부터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 내가 너희에게 준 그 모든 율법에 따라, 나의 명령과 나의 율례를 지켜라.” 14 그러나 그들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고, 주님이신 그들의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완고하였다. 로마서 2:1-11 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4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5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8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1-12 1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2 때가 되어서, 주인은 농부들에게서 포도원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3 그런데 그들은 그 종을 잡아서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4 주인이 다시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 종의 머리를 때리고, 그를 능욕하였다. 5 주인이 또 다른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을 죽였다. 그래서 또 다른 종을 많이 보냈는데,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6 이제 그 주인에게는 단 한 사람, 곧 사랑하는 아들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7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8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던졌다. 9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1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12 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여 하신 말씀인 줄 알아차리고,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불꽃야구’라는 프로그램 아시나요? 불꽃야구를 몰라도 야구감독 김성근은 다 아시죠? 불꽃야구는 그분이 감독을 맡고 있는 예능프로그램입니다. 김성근 감독 별명이 ‘야신’이에요. 야구의 신. 그만큼 감독으로서 역량이 탁월하다고 인정하는 분입니다. 그분 1942년생입니다. 올해 연세가 83세네요. 어느 날 방송에서 한 선수가 두 번의 실책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경기를 졌어요. 사람들은 실책한 선수를 질책합니다. 감독은 패배의 충격에 말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고는 그 선수를 감독실로 부릅니다. ‘너, 펑고 좀 받아라!’ 펑고는 코치가 배트로 쳐주는 볼을 반복해서 잡는 수비 훈련입니다. 그런데 감독이 직접 펑고를 칩니다. 83세 할아버지가요. 15분, 30분, 한 시간... 그렇게 두 시간을 하고 나서야 펑고가 끝이 납니다.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쓰러져 일어서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김성근 감독의 말입니다. ‘감독은 선수가 실수를 하면,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게 감독이야. 내가 그걸 하지 않으면 저 선수는 그저 실수한 선수로 기억되고 마는 거야.’ 그때 펑고를 받은 선수는 프로구단에 지명되어 지금 1군에서 뛰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김 감독은 그날 그 선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시간 동안 펑고를 쳐주었습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고 평가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 사람을 살려내는 말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감독님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한 선수를 살렸잖아요. 그것도 괜찮아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을 살리는 말을 하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 구약 성서의 말씀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마지막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하나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다음 왕이던 르호보암 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서게 됩니다. 분단이 되고 200여 년이 흐릅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은 오늘 본문 6절에 나오는 호세아였습니다. 구약성경으로 기록되어 있는 예언자 호세아와 혼동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입니다. 열왕기하에서는 북이스라엘 멸망의 이유를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성경을 따라오면서 확인해 봅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7절 뒷부분,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8절 중간, 이방 나라들의 관습과, 역대 왕들이 잘못한 것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선조들이 잘못했다면, 후대가 잘 살았으면 회복했겠지요. 하지만, 9절 이스라엘 자손도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온 땅에 스스로 산당을 세웠고, 10절 후반부, 어느 곳에나 돌기둥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세웠으며, 11절 모든 산당에서 분향을 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12절,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우상숭배였던 거죠. 그들이 신앙심이 없었던 것 아니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것,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의 신앙심은 곳곳에 산당이 세워지고, 산당마다 제사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소와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식들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으니, 열렬한 신앙심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신앙심을 품은 대상, 예배를 드린 대상이 누구였냐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배한 것은 이방 민족의 신과 하나님을 절묘하게 접목한 혼합종교들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통치했던 거의 모든 왕과 제사장들은 그렇게 이방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면서 외쳤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한다’고요. 이는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신들을 위하는 신을 섬긴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13절입니다. 13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여러 예언자와 선견자를 보내어서 충고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그 악한 길에서부터 돌아서서,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 내가 너희에게 준 그 모든 율법에 따라, 나의 명령과 나의 율례를 지켜라.”
그러나 그들은 14절, 끝내 듣지 아니하였고, 주님이신 그들의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완고하였습니다. 2-1.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유럽의 시대는 온통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중세는 역사적으로 천 년을 이어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중세 시대를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암흑의 시대’라고요. 온통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암흑의 시대라 부릅니다. 이런 아이러니도 없지요. 어떤 신앙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하여 주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땅에 기거하는 이방 신들을 향한 신앙인가? 해방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라면, 오늘 묶여 있는 모든 것을 해방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고난받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라면, 오늘도 고난받는 수많은 사람을 더불어 해방할 수 있는 믿음이며 신앙이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를 위해서 당신은 좀 더 억눌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자본주의와 결탁한 신앙은 그 옛날 북이스라엘의 변질된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죠. 세상은 변해갑니다. 제국의 시대에서 중세 시대로, 헬레니즘 시대에서 산업혁명의 시대로, 냉전시대에서 자본주의를 넘어 신자본주의 시대로, 이제는 ‘AI’의 시대로 변해갑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도 변해가는 세상 앞에 변질해 가거나, 세상과 타협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 14절에서 분명히 지적합니다. 14 그러나 그들은 끝내 듣지 아니하였고, 주님이신 그들의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였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완고하였다. 첫째 듣지 아니하고, 둘째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셋째 완고하여 고집불통이 되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지난 두 주 동안 말씀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죽음마저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너라도 살아보라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네가 믿는 주님을 드러내 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는 예수가 믿었던 하나님을 멍청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조차 하나님의 뜻임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한 그 믿음을 올곧이 지켜내신 거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은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타협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적절한 믿음’과 ‘이 정도면 됐지’하는 신앙으로 자꾸 타협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며,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기억하며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인으로 서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 강건한 믿음의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3.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서신서에는 열왕기하의 본문과 같은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먼저 로마서 2장 5절을 먼저 읽고 확인합니다. 5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완고(頑固)’라는 단어입니다. 완고하다. 융통성이 없고 고집이 세다는 뜻이죠. 북이스라엘 자손들이 완고했다고 열왕기하에서는 전합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잘못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바꾸기는커녕 고집스레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다 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에게 완고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단한 이유가 있어요. 바울 자신이 바리새파 사람이고, 율법학자였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침을 뱉어도 이렇게 뱉다니요. 그가 바리새파 사람인 것을 아는 다른 유대인들은 바울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그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1절입니다. 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 심판하는 기준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유대교의 경전입니다. 율법학자들의 역할이 그거였어요. 그래서 율법대로 행하지 않으면 심판했습니다. 당신은 유죄, 당신은 무죄, 이렇게요. 그런데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로 자기를 정죄하게 한다고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김성근 감독 이야기 드렸지요? 타인에 대해서 말하고, 평가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회사의 경영진, 여러 운동 종목의 감독,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 교인을 대표하는 장로,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 등등요. 그런데 남에 대해서 말할 때, 상대방을 살려내도록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김 감독이 실책을 저지른 선수에게 ‘너는 수비가 왜 그 모양이냐?’라고 말했다면, 그 선수 절대로 프로구단에 입단하지 못했습니다. 감독은 그저 펑고를 쳐줍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바리새파 사람들 이야기로 옵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사람들. 그들은 사람들이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남을 심판하는 사람, 똑같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는다고 사도 바울은 전합니다. 6절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살리는 말을 했다면, 주님도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완고하여 고집불통이라면, 주님도 우리에게 완고하실 것입니다. 그가 한 대로... 우리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길을 간다면, 주님도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 진리를 11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4.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 주시는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 주고, 소출의 얼마를 받으려고 종을 보냅니다. 세를 줬으니 대가를 받음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냅니다. 주인은 다른 종을 또 보냅니다. 이번엔 때리기까지 하고 빈 손으로 돌려보냅니다. 다시 보냅니다. 이번엔 죽입니다. 또 보내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아들을 보냅니다.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라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농부들은 그 아들이 상속자임을 알고, 재산을 가로채겠다는 욕심에 아들마저 죽입니다. 비유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9절부터 11절입니다. 9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 10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1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비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를 향한 비유인지,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 아실 수 있겠지요? 포도원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흔히 나타내던 상징이었습니다. 1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는 말은 농부들에게 포도 농사에 관한 모든 준비를 주인이 해 두었다는 것을 뜻하죠. 말을 듣지 않은 것은 농부들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탐욕에 눈이 멀어 농장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 버립니다. 우리가 앞서 구약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서신서를 보면서 한 선수 생명을 살려낸 김성근 감독과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드시고, 너희가 멸망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분명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엄중한 결산,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12절,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가 자신들을 향한 질책임을 대번에 알아차리게 되지요. 예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군중에 싸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기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5.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 그 사랑, 그 선택 부인하지 못합니다. 모두 인정하는 신앙인이잖아요. 그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즉 우리에게 선택에 상응하는 삶의 열매들을 요구하십니다. 그 삶의 열매를 보여달라고 여러 차례 보내다가 결국, 자신의 아들까지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 이렇게 이해합시다. 하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셨다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삶의 열매를 드리기는커녕, 아들을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삶에서 가르침을 져버리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배신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도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죽음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명확한 신앙인의 길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세상의 무엇과 자꾸 비교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그렇게 비교당할 분이 아니십니다. 교우 여러분. 신앙인으로 산다면 내 기준으로 심판하기보다는, 내 말로 평가보다는 타인을 살려내기 위한 나의 삶의 태도를 고민하십니다.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기회 주심을 잊지 마십시다. 현실의 고단함에 잠시 주저앉을 수는 있습니다. 잠시 후진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 고단함과 후진이 다시 한번 주님을 향한 큰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소망합니다. 그 마음 품고, 창조절을 넘어 대림의 절기로 나아 가십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2026년을 희망하고 계시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굳건한 믿음과 타인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품는 신앙인으로 살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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