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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 대림절 첫째주일 장 본 목사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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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대림절 첫째주일

20251130

 

시편 88:1-18

1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낮이나 밤이나, 내가 주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2 내 기도가 주님께 이르게 하시고, 내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4 나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며, 기력을 다 잃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5 이 몸은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버림을 받아서,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습니다. 나는 주님의 기억에서 사라진 자와 같으며,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도 같습니다.

6 주님께서는 나를 구덩이의 밑바닥, 칠흑 같이 어두운 곳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7 주님은 주님의 진노로 나를 짓눌렀으며, 주님의 파도로 나를 압도하셨습니다. (셀라)

8 주님께서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마저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하시고, 나를 그들 보기에 역겨운 것이 되게 하시니, 나는 갇혀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9 고통으로 나는 눈마저 흐려졌습니다. 주님, 내가 온종일 주님께 부르짖으며, 주님을 바라보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10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11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12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13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14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15 나는 어려서부터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몸이기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형벌이 무서워서, 내 기력이 다 쇠잔해지고 말았습니다.

16 주님의 진노가 나를 삼켰으며, 주님의 무서운 공격이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17 무서움이 날마다 홍수처럼 나를 에워쌌으며, 사방에서 나를 둘러쌌습니다.

18 주님께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을 내게서 떼어놓으셨으니,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주일, 성찬식이 있습니다. 하여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과 여러분을 위한 말씀을 합하여 전해 드립니다. 오늘은 다른 주일온세대예배와 말씀의 결이 좀 다릅니다. 제 간증이기도 하고, 여러분의 간증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말씀의 첫 시작, 여러분에게 생각거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두 가지 사건은 여러분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여러분은 지금부터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3년 전 일입니다.

 

20221029, 이곳에서는 축제로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할로윈 축제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인파 탓에 언덕길 아래 쪽에서 사람들이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너무 좁은 골목, 너무나 많은 인파로 인해 순식간에 압사 사고로 이어집니다.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건으로 159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주로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날은 더구나 토요일이어서 사고를 수습할 인력도 많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태원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부모이며, 친구이며, 지인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올해 11월 초에 일어난 일입니다. 울산화력발전소에서 보일러 타워를 해체하던 중 붕괴사고가 일어났습니다. 7명의 직원이 숨지는 대형 노동현장 사고였지요. 그들에게 그곳은 일터였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사고 희생자의 가족입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마음에 기억하고, 내가 이태원에서 죽은 청년들의 가족이며, 죽은 노동자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18절까지 꽤 긴 구절이고 이미 우리가 한 번 읽었지만, 이제는 이 시편이 어떻게 마음에 와닿는지 함께 읽습니다.

 

1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낮이나 밤이나, 내가 주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2 내 기도가 주님께 이르게 하시고, 내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 나는 고난에 휩싸이고, 내 목숨은 스올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4 나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며, 기력을 다 잃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

5 이 몸은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 버림을 받아서, 무덤에 누워 있는 살해된 자와 같습니다. 나는 주님의 기억에서 사라진 자와 같으며,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와도 같습니다.

6 주님께서는 나를 구덩이의 밑바닥, 칠흑 같이 어두운 곳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7 주님은 주님의 진노로 나를 짓눌렀으며, 주님의 파도로 나를 압도하셨습니다. (셀라)

8 주님께서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마저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하시고, 나를 그들 보기에 역겨운 것이 되게 하시니, 나는 갇혀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9 고통으로 나는 눈마저 흐려졌습니다. 주님, 내가 온종일 주님께 부르짖으며, 주님을 바라보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10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11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12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13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14 주님, 어찌하여 주님은 나를 버리시고, 주님의 얼굴을 감추십니까?

15 나는 어려서부터 고통을 겪었고, 지금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몸이기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그 형벌이 무서워서, 내 기력이 다 쇠잔해지고 말았습니다.

16 주님의 진노가 나를 삼켰으며, 주님의 무서운 공격이 나를 파멸시켰습니다.

17 무서움이 날마다 홍수처럼 나를 에워쌌으며, 사방에서 나를 둘러쌌습니다.

18 주님께서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을 내게서 떼어놓으셨으니, 오직 어둠만이 나의 친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심정입니까? 아마도 우리가 시편 88편을 다시 읽었을 때, 성경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왜냐면 참담하게 죽은 청년들과 노동자의 가족 입장에서 읽은 이 시편은 나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함이 밀려오고 나의 마음의 상처를 전혀 위로해 주지 못합니다. 이제 위로 한 번쯤 해줘도 될 텐데, 뭔가 반전이 일어날 것 같은데, 또 주저앉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잘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이 말씀은 분명한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제 저의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립니다. 제가 이 본문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과격한 표현을 하기까지는, 저에게 또 다른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께서는 1933년생이십니다. 살아계셨으면 아흔 살이 넘으셨겠네요. 평양이 고향이시고, 6·25 한국전쟁 때 월남하셔서 수도여고를 다니셨습니다.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두 개의 대학을 나와 3개의 정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고등학교에서 세 과목을 가르치시던 철녀였습니다. 꽤 잘 나가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어린이부를 맡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보다 설교를 더 잘하셨습니다. 어렸을 적 듣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설교는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어머니 설교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많을 정도니까요. 어린 제가 듣기에도 너무나 명료하고 명쾌한 설교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 스마트한 분이셨고, 당당한 분이셨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어머니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대쪽같은 목회자 집안이라서 돈과는 거리가 멀어 늘 가난하게 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에 관한 생각은 늘 자랑스러움이었습니다.

 

신학대학원 마지막 학기 즈음 방학 때입니다. 결혼 날짜를 잡고, 저는 기숙사를 나와 어머니가 계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와 중학교 2학년 이후로 같이 살아 본 적이 없었기에 결혼 전에 조금이라고 같이 지내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뒤늦게 시작한 신학공부, 쉬지 않고 6년을 달려오니 심신이 지쳐서 좀 쉬기도 하고 충전도 할 생각이었습니다.

 

제일 중요한 건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의학적으로 더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나쁘셨거든요. 점점 마약 성분을 높여가며 진통제로 고통을 이겨내던 시기였습니다. 거의 15년 가까운 투병 생활이니 어머니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방학 중에만 세 번이나 병원 중환자실에 실려가야 했습니다. 호흡기 내과, 정형외과를 옮겨 다니며 치료를 받느라 저는 방학 중 거의 집과 병원에만 있어야 했지요. 저도 지쳐갔습니다. 마음이 짠해지고 답답하고, 잠도 안 오고, 그저 이 녀석 쉴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벌주시나 보다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지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일이 터집니다. 11시쯤. 갑자기 집에 있는 TV가 꺼져버린 겁니다. 오래되기도 했고 수명이 다할 때도 된 거라서 바꿔 드려야겠다 생각했죠. 어머니께서는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계셔야 했기에 TV가 거의 유일한 소일거리였거든요.

 

그런데 제게 한마디 하시는 거였습니다. ‘지금 가서 사 가지고 와라!’, ‘?’ 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습니다. 2005년에는 밤 11시에 TV를 살 곳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 오라는 거였습니다. 그땐 차도 없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서 지금 TV를 못사는 이유를 어머니께 설명하는데 그게 통하지를 않습니다.

 

목회하던 시절 아무리 아프셔도 교우들에게 누가 된다며 이 악물고 교회에 가시던 어머니셨습니다.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병원에 심방 오셨을 때도 돌아가시고 나서 왜 말씀드렸냐고 저를 엄청나게 꾸짖던 그런 꼿꼿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고작 TV 한 대 때문에 밤 11시에 소동이 벌어진 겁니다. 방법이 없어서 일단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주문서를 인쇄해서 지금 주문했으니까 하루 이틀만 참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일단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수련회를 다녀왔지요.

 

그런데 수련회에서 돌아올 때까지 TV가 안 온 모양입니다. 쇼핑몰에서 일 처리를 잘못해서 지연되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님에게 전화가 옵니다. ‘지금 어머니 난리났다.’

 

상황을 직감하고 전화로 주문 취소하고 집 근처 전자상가에서 전시된 TV을 사서 택시로 날라왔습니다. TV를 설치하고 화면이 나오고 소리가 나오고... 그때 어머니의 표정은 예전의 꼿꼿함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하필 그날이 누님 생신이어서 생일 케익을 사러 다시 나오는데 케익들고 돌아가는 그 길에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왜 그리 허무하고 허망하던지요.

 

마약 성분 가득한 진통제로 고통을 견디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며 시편 88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찢고 싶었습니다. 꾹 참으면서 다시 읽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계속 읽었습니다. 찢고 싶은 심정이 들지 않을 때까지만 읽어 보겠노라 생각하며 계속 읽었습니다.

 

 

3. 이제 성경으로 돌아옵니다. 시편 882절을 보면 시인은 어떤 이유인지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4절부터 9절에 나온 것처럼 시인은 점점 폐인이 되어 갑니다.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힌 상황입니다. 마치 욥이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는 척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급기야 10절부터 시인은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뭔가 대답이 있겠지? 하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침묵합니다. 시인은 15절부터 또다시 탄식합니다.

 

시편 88편은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탄식입니다. 하지만 탄식뿐인 이 시편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1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낮이나 밤이나, 내가 주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앞에 나오는 네 단어만 다시 읽습니다.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마 많은 교우 여러분이 88편의 어두운 분위기에 밀려 이 부분에 집중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도 흔하게 내뱉는 말이어서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시편 88편을 신앙인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은 이미 모든 삶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등을 돌리니 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을 앞에 두고도, 시인은 너무나 뜻밖의 행동을 취합니다. 13절입니다.

 

13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교우 여러분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해도 안 들어 주시는데 그래도 아침마다 기도할 여력이 있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시인은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바로 1,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4. 이 시편을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읽었다고 가정한다면 시편을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하러 출근했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의 가족이 이 시편을 읽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저도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 시편을 버릴 뻔했으니까요.

 

아마 다른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읽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탄식뿐인 이 시편, 탄식으로 끝나는 특이한 구조 때문에 시편 88편은 우리를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또 하나 이 시편이 어려운 이유! 시인이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오늘 어떻게 하겠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 왔는지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아침마다 기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주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많은 논리적 비약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나를 그리도 사랑하신다면, 아침마다 그렇게 기도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면서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내 자녀들 죽기 전에, 내 아버지, 내 가족이 죽어 나가기 전에 나를 어둠에서 건져주셨으면 될 것 아닙니까? 무언가가,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대림절이 필요합니다. 대림절. 아기 예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이천여 년 전,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추스르는 절기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아픔을 몸으로 느끼고, 그 억울함을 십자가로 받으며, 그 슬픔을 하나님께 고하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에도 불구하고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당신의 숨소리를 우리에게 느끼게 하고 계시지요. 그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오늘, 살아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이지요. 현재의 내가 힘들어 죽겠어도 말입니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 그렇기에 내 인생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아침마다 주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고, 내 구원자 되신 주님이라고 또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그럼에도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럼에도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대림절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은 내 슬픔, 내 상황을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겠다 라는 우리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나의 아픔과 상실과 고통들을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치유하며 살아가는 그래서 실낱같은 소망 한 줄 품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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