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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장 본 목사 202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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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림절 셋째주일

성서주일

인권주일

20251214

 

창세기 32:22-28

22 그 밤에 야곱은 일어나서,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를 건넜다.

23 야곱은 이렇게 식구들을 인도하여 개울을 건너 보내고, 자기에게 딸린 모든 소유도 건너 보내고 난 다음에,

24 뒤에 홀로 남았는데,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25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26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28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고, 사람과도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히브리서 11:32-12:2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정복하고,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 입을 막고,

34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 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좋은 부활의 삶을 얻고자 하여, 구태여 놓여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37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38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판은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두셔서,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19-23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하고 말이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목사님이 오래전 어떤 동호회 활동을 할 때 있었던 일을 전해 드리려 합니다. 그 동호회는 사진 동호회였어요. 인터넷에 개설한 까페에서 같은 카메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죠.

 

그 시절엔 정모라는 게 있었어요. 정기모임의 줄임말이 정모죠. 늘 인터넷에서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일 년에 한두 번 만나서 같이 사진 찍고, 대화하는 자리였답니다.

 

어느 겨울, 동호회에서 정모를 하기로 했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인터넷 카페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이 전부였습니다. 전화번호도, 이름도 모릅니다. 강남역 6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 얼굴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모르고, 아는 것이라고는 닉네임 말고는 없으니 근처에 있는 사람 붙잡고 묻기 시작합니다. ‘혹시 강가딘님 아니세요?’, ‘혹시 싹수님 아니세요?’ 그러다가 어떤 한 사람이 저에게 묻습니다. ‘나우시카님이시죠? 안녕하세요. 저 까페 운영자 써니입니다.’ 제 닉네임이 나우시카였거든요.

 

같이 사진도 찍고 밥도 먹고 그랬지요. 제 옆에는 인터넷에서 댓글로 친하게 지냈던 강가딘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분이 앉아 있었답니다. 댓글을 통해 꽤 친하게 지냈었고, 게다가 저와 동갑내기였어요. 한참 대화 후 제가 물었답니다.

그런데요. 강가딘님, 혹시 이름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순간,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집니다. 여러분 그런 순간 있죠? 내가 말 한마디 했는데 모든 사람이 나에게 집중하는 그런 분위기요. 그 친구가 대답합니다. ‘왜요? 그냥 강가딘만 알고 계세요.’ 머쓱해진 저를 발견했지요.

 

그날 하루 내내 닉네임만 부르고 다녔던 거에요. 저는 그게 너무 어색했던 거죠. 그래서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는데, 머쓱해진 대답만 듣게 된 거죠.

 

며칠 후, 강가딘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친구가 저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거였어요. ‘그때 당황하게 했다면 미안하다. 그런데 난 그런 모임까지 내 이름을 밝히기는 싫었다. 그래도 사과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밝힌다. 난 강**이다.’

 

이름을 알려줘서 고맙기는 했는데요. 목사님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런 모임까지 내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라는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여러분도 닉네임 많이 사용하지요? 물론 이름도 있고요. 요즘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걸 더 꺼리는 시대이기도 하죠. 그런데 목사님이 부탁 하나 할게요.

 

믿음 생활은 실명으로 하기를 바라요.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 앞에서는 닉네임, 가명 말고 내 이름으로 기도하고, 내 이름으로 말씀을 따라 달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유는 자신이 드러나기를 꺼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주님 앞에서는 내 이름 그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름대로 살아갈 때, 오늘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드러내며 신앙생활을 하는 어린이-청소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과 이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 이름을 수도 없이 부르고 불리며 살아갈 테지요. 우리가 가진 이름, 그것을 보통 실명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아까 얘기했던 이름요. 닉네임요. 주로 인터넷에서 실명 대신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몇 개의 닉네임이 있나요? 저요? 꽤 많습니다. 아까 얘기했던 나우시카, 30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닉네임입니다. 어디서는 리니아빠, 어디서는 지혜남편, 어디서는 아그본. 저는 총 네 개의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닉네임의 특징이 있어요. 자주 바뀝니다. 저처럼 댓글을 별로 달지 않으면 자주 바뀔 이유가 없는데 특정 사이트,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하루가 멀게 닉네임이 바뀝니다. 댓글부대라고도 하잖아요.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좋은 의미도 있어요. 닉네임에 자신의 꿈을 담아내는 사람도 있거든요. 저에게는 나우시카가 그런 닉네임이에요. 나우시카는 어떤 영화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의 이름이거든요.

 

여러분에게 그저 묻습니다. 사용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닉네임을, 어떻게, 왜 사용하고 있습니까?

 

오늘 창세기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창세기 3227절입니다.

27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천사가 묻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밤새 씨름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과장하면 하나님과 한판 붙은 겁니다. 천사가 보니 야곱이 하도 끈질기니까 허벅지 뒤를 한 대 !’ 치고는 물어본 겁니다. ‘너 이름이 뭐야?’...... ‘저는 야곱입니다.’

 

여기서 평소와 다르게 복음서로 넘어가 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펼쳐놓고 말씀을 이어갑니다. 대략 이천여 년 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말이었죠.

 

곧 그리스도가 온다!’, ‘예수라는 사람이 올 것이다. 회개하라. 이것이 그분을 맞을 너희의 준비다.’ 이런 말들이었습니다. 행색은 유대인하고 비슷한데, 말도 비슷하게 하는 것 같은데 예수니, 그리스도니 하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이 사람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유대 사람들도, 제사장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도 요한의 말이 궁금하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19절입니다.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3. , 지금까지 두 개의 질문이 나왔습니다. 천사가 야곱에게 이렇게 물었지요.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 말로 하니까 두 질문이 비슷하게 들리지요? 그런데 영어로 보면 두 질문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하면 “What’s your name?”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를 영어로 하면 “Who are you?”입니다.

 

“What’s your name?” 어떻게 대답하죠? “My name is ***.” 그런데요.

“Who are you?”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두 질문의 차이가 명확하지요. “What's your name?”이라고 물을 때는 이름만을 대답하는 반면에 “Who are you?”라고 물을 때는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닌 나를 규정하는 어떤 것, 나의 직업 등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요한에게는 “Who are you?”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한의 대답입니다.

 

20,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21, 다시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하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또 묻습니다. 그것도 아니랍니다.

 

묻는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이 좀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왜냐면 그들은 보냄을 받아서 왔기에, 대답할 거리를 가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달라고 거듭 묻습니다.

 

이제야 요한이 대답합니다. 23절입니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하고 말이오.”

 

유대 사람들이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관해 떠돌던 세간의 소문 때문이었지요. ‘요한이 메시아래. 요한이 예언자래. 요한이 그리스도래.’ 누군가 메시아라는 소문은 온 유대를 긴장하게 만들만 한 것이었죠.

 

그런데 요한의 대답이 이런 동문서답도 없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바로 너희는 곧게 하여라, 주님의 길을.”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괜찮은 대답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뚱딴지같이 요한은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한 거죠.

 

허허벌판에서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해 본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가 들을까요? 누가 알아줄까요? 그리고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까요? 그런데 그런 허허벌판에서도 요한은 외친다고 대답합니다. 뭐라고요? “너희는 곧게 하여라, 주님의 길을.”이라고 말이죠.

 

여기서 요한의 한결같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듣건 말건, 알아주건 말건, 앞에 아무것도 없는 광야라도 나는 외치겠다 하는 요한의 믿음이 깃들어있는 것입니다.

 

 

4.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What’s your name?” 다 대답하실 수 있지요?

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Who are you?” “당신은 누구입니까?”

 

학생은 나는 학생입니다.’라고 대답하겠죠. 직장인은 나는 직장인입니다.’라고 대답할 겁니다. 하나하나 들어가 보죠. 초중고, 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다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 시간은 최소 2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여러분은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직장인이라고 대답하신 분들, 서른 즈음 입사해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정년퇴직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35년 동안 직장인 했습니다. 정말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나고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훗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셨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 이름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을 되려 숨기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 천사가 나타나 너 이름이 뭐니?’라고 물을 때조차 실명 밝히기 싫어서 저 나우시카인데요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볼 때 당당하게 여러분의 이름을 대실 수 있습니까? 그렇게 자신있고, 당당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행여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부터라도 내 이름에, 여러분의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십시오.

 

야곱은 자신의 행동에 당당했습니다. 아니 갈급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요. 그래서 한 가지만 해달라고 천사 붙잡고 늘어진 겁니다. 축복해 달라고요. 야곱이라는 이름 걸고 말이죠. 아주 당당했습니다. 한 대 맞아서 엉덩이뼈가 다치긴 했지만 그래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묻는 질문에 나는 야곱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말했던 야곱에게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닉네임을 붙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요.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닉네임을 스스로 만들어 부릅니다. 닉네임을 만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닉네임에 파묻혀 내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처럼 때로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닉네임을 붙여 주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닉네임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책임있는 신앙을 지켜가는 이들에게 이름보다 더 소중한 닉네임을 붙여 주십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닉네임을 붙여 주신 것처럼 말이죠.

 

 

5.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구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그리될 수 있는 것일까요? 서신서의 말씀으로 함께 다짐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서신서의 말씀은 굳이 풀어드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읽는 구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읽기만 해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 2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2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대림절 셋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전제가 있어요. 그건 내가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다림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그분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말씀처럼 예수를 바라봅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라는 말은 우리를 맨 처음 믿음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또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입니다. 바라보라는 말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하자는 말입니다.

 

세상이 뭐라 해도, 세상에서 힘겨워도, 세례 요한처럼 허허벌판 광야에서 외치는 상황이어도 십자가를 견뎌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께 눈길을 고정하십시다. 그 정도는 해야 기다림의 자세를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께 시선을 고정합시다. 그래야 흔들림 없이 또 한 해를 세워갈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지내온 은진교회 지난 일 년을 돌이키십시오. 은혜로 채워주셨던 일 년의 시간을 떠올려보십시오. 우리가 한 일은 주님께서 바라보시던 곳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한 일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그 주님을 기다립니다. 그 주님이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다시 오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교우 여러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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