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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마누엘 신앙의 정수(精髓) / 대림절 넷째주일 | 장 본 목사 | 2025-12-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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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임마누엘 신앙의 정수(精髓) 대림절 넷째주일 20251221 예레미야 23:5-8 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6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7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8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요한일서 4:13-21 13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14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16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께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두 이야기를 드립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어요. 이름은 그레고리입니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그레고리는 자신이 거대한 벌레로 변했음을 알게 됩니다. 가족들은 그레고리가 벌레로 변한 것임을 알게 되지요.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방에 가둬 버립니다. 그레고리는 방에 갇혀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살아갑니다. 가족들은 그를 혐오하고 미워합니다. 결국, 아빠가 던진 사과에 난 상처가 덧나서 그레고리는 죽습니다. 그의 시체는 가족이 아닌 가사 도우미 할머니가 쓰레기처럼 내다 버립니다. 남은 가족들은 그레고리로 인한 고통에서 해방된 것이 기쁜 나머지 웃으며 이사가는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변신』이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 이름은 같습니다. 그레고리입니다. 어느 날 아침, 역시 그레고리는 딱정벌레로 변합니다. 그레고리는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워낙 작아서인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친구 마이클만 그레고리가 딱정벌레로 변한 것을 알아봅니다. 그레고리는 천장에 붙어서 가족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절실하게 외칩니다. 그제야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부모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벌레여도 괜찮아. 넌 그레고리잖아. 엄마아빤, 그래도 널 사랑한단다.” 다음 날 아침, 그레고리는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로렌스 데이비스라는 작가가 카프카의 변신 이야기를 빌려서 다시 쓴 소설입니다. 책 이름은 똑같이 『변신』입니다. 첫 번째 『변신』은 1915년 작품이에요. 두 번째 『변신』은 90년 뒤에 나온 작품입니다. 여러분 두 책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드나요? 누군가는 혐오를, 누군가는 지지를 해 줍니다. 그랬더니 삶의 결과가 달라지지요. 목사님은 이 두 이야기가 우리 신앙인의 길을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신앙인은 타인을 지지해 주는 사람이라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나거든요. 그 지지를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바로 ‘사랑’이랍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타인을 지지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께 사랑받는 어린이-청소년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네 번의 주일입니다. 대림절에는 뒤에 보시다시피 다른 절기와 달리 네 개의 초를 준비합니다. 대림절을 상징하는 색은 보라입니다. 예수님을 맞이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의미하는 흰색으로 4주 동안 나아갑니다. 보라색 초가 점점 옅어지며 흰색으로 나아가지요. 그래서 오늘은 저렇게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게 되는 겁니다. 네 번째 초는 흰색입니다.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는데, 마지막 초가 흰색이라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그리스도 예수가 이미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미 오신 예수님을 다시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에서 절기의 의미는 매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일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년 대림절을 지키지만, 2025년 대림절의 의미는 작년의 대림절과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삶이 해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작년 이맘때는 온 나라가 비상계엄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던 때입니다. 다 기억하시잖아요. 그게 벌써 일 년 전입니다. 2020년의 대림절은 어땠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땐 코로나로 인해 교회에 오지도 못했습니다. 영상으로 예배드렸던 시기입니다. 그 암울했던 시기도 모두 기억하시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 상황에서도, 작년 비상계엄의 시대에서도 대림절을 지켰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우리에게 대림절은 찾아왔고, 그 가운데 오시는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올해도 우리는 대림절을 지켜내고 있습니다. 매년 반복하는 절기이지만, 매년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상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지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인의 믿음은, 신앙인의 정신은 어떠한 시대 상황 가운데서도 온전한 주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지난주 말씀으로 설명하자면 주님 바라보시는 곳에 우리의 시선을 두었을 때, 진정한 신앙인의 믿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2020년 코로나 시대의 대림절에 눈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작년 대림절 눈물로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올해 또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대림절을 지킬 수 있는 겁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 잘 헤아리며 이 대림절을 맞이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3.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오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 옛날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이 세상의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도 전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될 때까지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그 날이 오고 있다.” 했습니다. 당장 올 것 같았습니다. 내일이라도 그날은 열릴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그 여정은 너무나 멀고 험난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인은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하나님의 하루는 우리의 천 날과 같다.”고 말이죠.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메시아는 지금 당장 오고 계신 분이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지금 백성들은 너무나 힘겨운 삶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왕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그동안 이집트 땅에서 그들의 조상을 이끌어 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며 살아왔습니다. 종살이에서 해방해 주시는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그마저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삶이 종살이 때의 삶보다 더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23장 7, 8절입니다. 7 그러므로 보아라, 그 날이 지금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8 그 대신에 '이스라엘 집의 자손이 쫓겨가서 살던 북녘 땅과 그 밖의 모든 나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고향 땅에서 살 것이다. 8절의 선포는 주님의 이끄심이 위대한 과거의 사건이었던 이집트에서 해방하신 주님의 손길이 아니라, 오늘 현재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실 주님의 손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 시대의 정신은 긴박함 그 자체였습니다. 민족이 사라질 위기였고, 긴장 상황이었던 겁니다. 4. 또 하나의 긴장 상황이 오늘 말씀에서 나옵니다. 복음서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은 지난 2023년 대림절 첫째주일 본문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 본문이 요셉의 관점에서 세 가지 긴장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풀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긴장 상황은 부부의 관계를 맺지 않고 생명을 잉태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의 관점에서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혼인을 파기할 만한 긴장 상황입니다. 두 번째는 요셉이 꾼 꿈 때문에 일어납니다. 꿈에서 천사는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사실, 그 아들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 그 아기가 백성들의 구원자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심란하여 조용히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던 요셉에게 나타난 꿈입니다. 마지막 긴장 상황은 꿈에서 깬 후의 상황입니다. 꿈에서는 앞으로 가라 하는데, 요셉 자신은 모든 것을 멈추려 했거든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요셉은 어떻게 했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엄청난 긴장의 연속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와 마태복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긴박한 긴장 상황 앞에 놓여 있습니다. 다른 상황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민족의 위기 앞에 놓여 있고, 마태복음은 한 개인의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은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빗대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위기의 순간이 옵니다. 나 개인의 위기 상황이 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위기 상황도 옵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교회로 말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십니까? 여러분. 교회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두 해결 방법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감히 말씀드립니다. 두 해결 방법 모두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전제할 때 그 방법은 같습니다. 이제부터 성경을 읽으며 위기 해결 방법을 알아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3절 뒷부분, 괄호 부분만 다시 읽습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신앙인의 개인적 위기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는 순간 풀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방법이 없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를 잊지 않는 순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교회는 살아납니다. 반드시 살아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도 일어설 수 없습니다. 5. 서신서의 말씀을 찾아 읽어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입니다. 16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18절, 19절도 읽습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거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는 신앙.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말만 하면 자칫 우월감에 빠질 수 있어요. 내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임마누엘 신앙을 완성시키는 본문이 바로 오늘 요한일서의 말씀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요. 하나님도 ‘사랑’하는 사람 안에 계신다고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선택이 아니라, 간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요. 그 사랑에는 그래서 두려움이 없다고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마저 내쫓는다고요. 이집트에서 주님 해방의 손길이 왜 두렵지 않았겠어요? 상대는 창과 칼을 지녔는데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임을 느끼는 순간, 그 손길 따라 두렵지만, 미지의 세계로 나설 수 있었단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힘든 일이 있어요. 얼마나 힘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살겠어요?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내고, 믿을 수 있다면 나를 짓누르는 두려움이 사그라들 수 있단 말입니다. 제가 올해 대림절에 계속 강조하는 말씀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은진교회를 지켜주셨기에 올해도 감사함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고 은혜로, 담대함으로 내년을 세워나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 지켜주심의 본질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할 수 있고 두려움이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신앙의 정수(精髓)’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긴장 상황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녹여내는 겁니다. 요셉은 그래서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태어나게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딱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말씀을 정리합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가지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더 확장해 나가십시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에서 벌레로 변한 자식을 버린 가족이 있습니다. 그런데 벌레로 변한 자식을 지지했던 가족도 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사랑의 차이입니다. 포용의 차이입니다. 임마누엘 신앙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일, 사랑으로 임마누엘 신앙을 완성하며 우리에게 오셨고, 다시 오고 계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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