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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작! / 성탄절 둘째주일 / 새해주일 | 장 본 목사 | 2026-01-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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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영상의 사이즈와 화질은 500kbps, 중간화질입니다. 영상은 업로드 시 설정할 수 있습니다. . 시 작! 성탄절 둘째주일 새해주일 20260104 이사야 62:1-7 1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2 이방 나라들이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3 또한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 4 다시는 어느 누구도 너를 두고 ‘버림받은 자’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너의 땅을 일컬어 ‘버림받은 아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너를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여인’ 이라고 부르고, 네 땅을 ‘결혼한 여인’ 이라고 부를 것이니, 이는 주님께서 너를 좋아하시며, 네 땅을 아내로 맞아 주는 신랑과 같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5 총각이 처녀와 결혼하듯이, 너의 아들들이 너와 결혼하며, 신랑이 신부를 반기듯이, 네 하나님께서 너를 반기실 것이다. 6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들을 세웠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늘 잠잠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을 늘 주님께 상기시켜 드려야 할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늘 상기시켜 드려야 한다. 7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실 때까지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 예루살렘이 세상에서 칭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주님께서 쉬시지 못하게 해야 한다. 로마서 11:13-24 13 이제 나는 이방 사람인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만큼, 나는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14 나는 아무쪼록,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 15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심이 세상과의 화해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들을 받아들이심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삶을 주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6 맏물로 바치는 빵 반죽 덩이가 거룩하면 남은 온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그러합니다. 17 그런데 참올리브 나무 가지들 가운데서 얼마를 잘라 내시고서, 그 자리에다 돌올리브 나무인 그대를 접붙여 주셨기 때문에, 그대가 참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양분을 함께 받게 된 것이면, 18 그대는 본래의 가지들을 향하여 우쭐대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그대가 우쭐댈지라도, 그대가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그대를 지탱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9 그러므로 “본래의 가지가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내가 접붙임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고 그대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접붙은 가지도 아끼지 않으실 것입니다.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에게 인자하게 대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 23 그러나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그 가지들도 접붙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수 있습니다. 24 그대가 본래의 돌올리브 나무에서 잘려서, 그 본성을 거슬러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면, 본래 붙어 있던 이 가지들이 제 나무에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가복음 1:1-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한 것과 같이,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5 그래서 온 유대 지방 사람들과 온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에게로 나아가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7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8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 은진교회 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 여러분에게 주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함께 인사합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과일 한 상자를 먹는 두 가지 방법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무슨 과일로 할까요? 사과 한 상자가 있어요. 상자로 과일을 시키면 배송하는 과정에서 상한 과일이 생기기 마련이죠. 어떤 사람들은 상자를 열고, 좋지 않은 사과를 먼저 먹습니다. 이렇게 먹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대략 이렇습니다. ‘더 상하기 전에 안 좋은 것부터 먹는 게 당연하지.’라고요. 이런 사람들도 있어요. 좋은 과일부터 먹는 거죠.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오래 두면 상하는 건 마찬가진데 맛난 것부터 먹는 게 좋잖아?’라고요. 하루에 두 개씩 먹는다고 가정하면, 좋은 사과를 먼저 먹든 흠집 사과를 먼저 먹든 한 상자를 먹는 시간은 같겠지요. 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어요. ‘상한 것부터 먹으면 결국 멀쩡한 것도 상해서 죄다 상한 것만 먹게 되잖아.’, ‘아니지. 좋은 것부터 먹으면 상한 사과는 더 상할 거잖아.’ 여러분은 과일을 어떻게 드시나요? 결론은 어떻게 먹든 결국 다 먹게 된다는 거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향의 차이일 뿐, 사과 한 상자를 다 먹는다는 사실은 두 방법 모두 같습니다. 결국,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는 거예요.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일이 아니라는 거죠.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일은 따로 있어요. 어린이-청소년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에요. 시간을 사용하는 데는 좋고 나쁘고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아무런 대가 없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니까요. 돈 주고 산 과일 한 상자 먹는데도 저렇게 고민하면서 먹는데, 우리는 그저 값없이 주신 시간에 대해서는 고민을 하지 않는 거죠. 어린이-청소년 여러분. 2026년이 ‘시작’되었어요. ‘시작’되었다고요. 여러분의 모든 날이, 모든 시간이 하나님과 함께 신앙인으로 시작하는 2026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여러분을 위한 말씀입니다. ‘시작’되었습니다. ‘시작’했습니다. 2026년이 말이죠. 그리고 또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복음서의 말씀부터 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국어 공부 한번 해 볼까요? 주어가 뭘까요? 우리 국어 시간에 주어에는 조사 ‘~은, ~는, ~이, ~가’가 붙는다고 배웠잖아요. 아! ‘시작은’이라는 단어에 주격조사 ‘~은’이 붙었네요. 주어는 ‘시작은’ 이겠네요. 맞죠? 주어니까 중요하겠지요. 시작이래요. 무엇의 시작인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랍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이 헬라어 성경으로는 어떻게 표기되어 있을까요? 표기대로 제가 한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작은 헬라어로 ‘아르케’입니다. 그 단어가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첫 단어입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라고 푼 것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나요? “시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말입니다. 우리 어떤 놀이할 때, ‘준비~, 시~작!’이라고 외칩니다. 요리경연대회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부터 요리 시작!’ 시작이라고 외치면 무언가가 움직여집니다. 술래잡기를 하면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요리하면 동분서주 주방을 뛰어다닙니다. 시작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마구 움직이게 하는 단어입니다. 복음의 시작으로 마가복음은 새 역사를 써갑니다. 그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술래를 피해 도망가거나, 요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2절입니다.
2 예언자 이사야의 글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길을 닦을 것이다.” 심부름꾼을 보냅니다. 그분, 예수가 올 길을 미리 닦을 분을 보냅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얼마되지 않은 주일에 요한이 뭐라고 말했는지 자세히 풀어드렸습니다. 3절, 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세례자 요한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성합니다. 복음의 시작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시작했습니다. 2026년이 말입니다. 시작했으니 벌써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으신지요? 술래를 피해서, 요리경연대회 참석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계시는지요? 뛰기 전에 준비 운동은 충분히 하셨는지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2026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완성해 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시작은 우리가 처한 삶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지켜나가는 삶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올 한해, 신앙인의 삶을 살아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새삼스럽지요? 우리는 보통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좋고 기쁜 소식이어서 그럴까요?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부르는 여러 단어가 등장합니다. 어떤 이는 순복음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자기 교단이 원조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치 그 복음의 첫 시작이 자신인 듯, 포장합니다. 중요한 사실, 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주의 시대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들어본 것 같으시죠? 로마제국의 1대 황제입니다. 우리가 조선의 1대 왕은 다 알아요. 태조 이성계 아닙니까? 일면식도 없는 이성계를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는 한 시대의 초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입니다. 복음이라는 단어는 로마제국 황제에 관한 말을 전할 때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황제의 아들이 태어납니다. 전 국민에게 선포합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요.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서 온 국민에게 전리품을 하사합니다. 이것도 복음입니다. 좋은 소식이잖아요. 배고픈 사람들에게는요.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먹을 것이 없을 때, 이집트에서 가끔 받아먹던 고깃국물을 그리워하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게 복음이었다고요. 황제가 선사하는 좋은 선물요. 복음은 그런 단어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신실한 분들은 이렇게 반론해요. ‘에이, 그래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처음 쓰인 단어가 아닐까요?’라면서요. 아니요. 고대 로마 황실 문서에 이미 나오는 단어가 복음입니다. 이렇게 써 있거든요. ‘황제의 탄생은 세상을 향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이죠. 마가복음 1장 1절을 다시 읽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 황제 비문과 마가복음에서 같은 단어를 씁니다. 복음요. 복음의 시작이요. 그런데 비슷하지요. 사용하는 느낌이 비슷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마가복음이 전하는 복음의 시작이 로마제국과의 긴장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주피터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에 맞서 있습니다.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스스로 신이라 부르던 황제의 복음 앞에, 어디에도 있는지 모르는 작은 변방의 한 동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됩니다. 수없이 많은 노예의 손으로 큰 돌판 앞에 새겼던 황제의 복음 앞에, 어느 동굴에서 양피지와 파피루스에 또 다른 복음이 써 내려갑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었으니 황제의 복음은 부정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진짜 복음이 시작되었으니, 거짓 복음은 끝나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4. 이천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서신서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제가 늘 말씀드렸지요. 바울이 이방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곧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입니다. 우리도 유대 사람은 아니잖아요. 바울은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된 것은 유대 사람들이 자신의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고, 대신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섭리를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갈등이 있습니다. 이방 사람 안에서 우쭐대는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우쭐대는 사람이 타인을 존중할 리 없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자꾸 뽐내는 사람들이 유대 사람을 존중할 리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이던 당신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유대 사람의 우쭐댐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당신들마저 우쭐댄다면 유대 사람과 같은 처지일 뿐이라고 오늘 서선서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잖아요? 신앙인이 되었으면 점점 성숙해지고, 점점 더 겸손해져야 하는데 왜 신앙인의 연차가 거듭될수록 우쭐대던 유대 사람과 같아지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경계하며 말씀합니다. 로마서 11장 20절입니다. 20 옳습니다. 그 가지들이 잘린 것은 믿지 않은 탓이고, 그대가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바울은 또 말씀합니다. 교만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두려워하십시오. 이것이 새로운 새해를 시작하는 신앙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22절에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전합니다. 다정함과 엄격함을 모두 지니고 계시다고요. 여러분,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다정함 안에 머물러 계십시오. 하나님의 엄격하심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22절 마지막, 그대도 잘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시작되었습니다. 2026년이요. 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2026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 삶이 다시 새로운 시간으로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또 복음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아달라는 당부입니다. 오늘 복음의 당부는 겸손이며, 그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다정하심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우쭐대지 않는 것입니다. 의기양양하게 뽐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은진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새해 첫 주일이지만, 교회력으로 성탄절 둘째주일에 속합니다. 대림절과 성탄일을 거쳐 오늘까지 아기 예수는 그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다가오셨습니다. 그 복음의 시작을 함께 만들어가는 2026년이 되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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